나의 수필세계

스승이 사라져가는 세상

죽장 2012. 6. 11. 10:57

   스승의 날이 있는 오월이 지나갔다.

  나에게 있어 금년 스승의 날은 좀 쓸쓸했다. 존경하던 K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떠나신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음성이며 모습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간다. 고백하건데 잊혀져가고 있다.

  선생님 누워계신 무덤에 잔디가 돋아나는 봄 날 찾아뵙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은 봄바람처럼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선생님께 바치는 은혜의 꽃가지 하나 바람벽에 걸어놓고 오늘은 진정 아픈 마음으로 문안인사를 올리고 싶다. 그래도 어쩌랴. 선생님은 이렇게 제자의 뇌리에서 잊혀져가지만, 그날 선생님의 영전에서 읽었던 조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이 시작된 지 50년. 오늘 비로소 선생님의 부재를 확인하며 흘러간 반세기 세월을 돌아봅니다. 선생님과 저는 철부지를 가르쳐주신 교실에서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고, 이승을 떠나는 순간까지 영원한 스승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교사가 되었기에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저의 교직생활 내내 교과서로 존재했습니다.

  까까머리 시절 ‘이놈아, 나는 너를 믿는다’ 하셨던 그날의 말씀 한마디가 화살처럼 날아와 어린 저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선생님께서 날리신 신뢰의 화살 한대가 제가 학생들에게 자신 있게 날리는 수천, 수만 가닥의 희망이 되었고, 미래가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일년에 한두 번 선생님 댁의 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면 맨발로 성큼 일어나 손을 내밀던 온화한 미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을 뵙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며칠간은 저도 모르게 행복한 웃음이 나오고는 했습니다. 신뢰의 중요함을 깨우쳐 주셨던 선생님은 제 부실한 세상살이에 빼놓을 수 없는 기둥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선생님! 부임해간 학교에 벚나무가 많았습니다. 따스한 봄 날 벚꽃이 만발하면 꽃그늘 아래로 선생님을 모셔서 좋아하시는 약주 한 잔 대접하겠다고 헛인사만 드려 죄송합니다. 1년 전 그날 함께했던 식사가 마지막이었고, 그날 들었던 음성을 더 들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저승에서라도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의 날에 뵈올 수가 없다면 꿈에서나마 찾아뵈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난 해 12월.

  그 무렵부터 학교폭력이니 집단따돌림이니 하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산불이 가랑잎을 태우며 온 산으로 번지듯 학교 안팎에서 타오르는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의 불길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 진행형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의 숫자가 하나 둘 늘어나고,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나와 내 동료들도 존경받는 스승의 위치에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 싸우는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는 교사들이 있는 한 내 아이의 미래도 없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향해 욕설을 하고 선생님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교실, 어머니가 선생님에게 삿대질을 하고 더러는 선생님의 머리채를 잡아채기도 하는 시대에 스승은 사라져간다.

  그러나 여전히 어른들의 가슴 속에 스승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에게 종아리를 맞은 날도 집에 와서 말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더 혼이 날게 뻔했기 때문에. 친구와 멱살을 잡고 뒹구는 현장에 어디선가 선생님이 나타나서는 시비를 가려주셨다. 잘못한 녀석도, 잘 한 녀석도 선생님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며 반성하였다. 선생님의 강권에 못 이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하고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어른들은 회상한다. 그 시절 참으로 엄했던 선생님으로 인하여 오늘의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마워하고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학창시절의 선생님이 있다면, 내 아이가 진정 건강하게 자라기를 희망한다면 교사들을 스승의 자리에 떳떳하게 세워 달라고 이 땅의 어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또 흔들리면서 자라고, 싸우면서 우정을 나눌지언정 제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하소연하고 싶다.

  지난달에도 모처럼 찾아뵙겠다고 L선생님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한사코 거절하신다. 전화기를 통해 듣는 음성조차도 인정이 묻어난다. 목소리만으로도 마음에 안정되고 기분이 흐뭇하다. 학창시절 멋진 스승과의 만남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음은 분명하다. 연세 들어 세상을 떠나는 스승을 영원히 모시고 살아갈 수는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아이들로 인하여, 학부모들로 인하여 교단에서 스승이 사라져가는 현상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하겠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진정으로 그리운 선생님을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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