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겨울 영산홍

죽장 2012. 1. 15. 09:43

겨울 영산홍


  꽃도 돌연변이가 있나 보다. 영산홍은 대개 봄이 무르익을 무렵에야 피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 녀석은 겨울이 시작되는 12월부터 하나 둘 피기 시작하여 1월 중순이면 만개한다. 꽃잎이 완전히 떨어지기까지는 족히 두어 달이 걸리니, 겨울 내내 피어 약간은 쓸쓸한 겨울 베란다를 장식하며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우리 집으로 옮겨져 온 첫 해는 겨울이 따뜻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해마다 세월을 잊었는지 앞당겨 피고 있다. 영산홍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제멋에 취해서 자유롭게 피고 지는 영산홍이 부럽다.

 

  우리 집 영산홍에는 색다른 사연이 있다. 2002년 1월이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집사람이 제7회 「대한민국 간호인상」을 받은 기념으로 뭘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때마침 꽃집에 만발해있는 영산홍을 선택하였다. 그것이 우리 집으로 옮겨져서 10년 째 한 가족이 되어 잘 자라고 있다. 꽃 전체는 연분홍색이지만 꽃심 쪽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흔치않은 종류이다. 꽃송이 하나가 어른 주먹만큼 크다.

 

  황동규의 「겨울 영산홍」을 읽는다. 불타와 예수가 등장하여 삶과 죽음을 논하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영산홍으로 시선을 돌리며 불타가 말했다.

          "허긴 죽음에 들켜 죽음을 공들여 만드는 자에게

          떨어져 보고 안 봄이 무엇이겠는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수가 받는다.

          "공들임을 빼면 인간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황동규 ‘겨울 영산홍’ 부분)


  우리 집 영산홍 사연도 황동규 못잖다. 영산홍과 마주하고 있으면 그날의 감흥이 되살아난다. 집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난치병을 앓고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업을 벌였다. 취지에 공감하여 동참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이 사업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연이어 전국적인 ‘난치병 학생 돕기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아마도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뜻밖에 큰 상을 받는 행운까지 얻은 것으로 짐작된다.

 

  올 해도 어김없이 만발한 겨울영산홍을 바라보며 나도 세월을 잊는다. 첫사랑이라는 영산홍의 꽃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 집 겨울영산홍은 수줍은 얼굴 달아오르게 하는 춘정이 아니다. 젊은 나그네 신열 앓게 하는 농익은 향기가 아니다. 속절없이 피었다가 단박에 고개 숙이며 지조를 팔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월의 잔주름이 훈장 같은 편안함이다. 그것은 잘 숙성된 된장국처럼 은은하게 속 깊은 맛이다. 그것은 또 석달하고도 열흘을 기다려주는 구들장 같은 사랑이다.

 

  화단이자 수목원인 아파트 베란다. 비좁은 공간을 마다않고 뿌리를 내려 철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도 달며 오순도순 자라고 있다. 베란다 창에 기대서서 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산과 들에 직접 나가서 느끼고 싶은 갈증을 푼다. 어린 시절 앞마당 돌담 아래 자리 잡았던 화단을 연상하며 추억에 젖는 즐거움을 더불어 얻는다. 베란다를 바라보면서 말없는 이들과 교감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오늘도 영산홍 앞에서 지긋이 눈을 감는다. 난치병을 앓는 모든 학생들의 쾌유를 기원한다. 아픈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난 아이들과 함께 봄을 맞고 싶다. 그들의 미래도 겨울 영산홍 연분홍빛으로 곱게 타오르는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수필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라타너스   (0) 2012.02.21
제갈공명이 그립다   (0) 2012.01.30
노박덩쿨  (0) 2011.12.09
죽계구곡의 초겨울  (0) 2011.11.24
내 문학의 출발지, 경주   (0) 2011.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