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노박덩쿨

죽장 2011. 12. 9. 17:36

  계절이 황금색 가을을 건너 은백색 겨울에 도착하면 내 그리움의 열매는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노란색을 견디다 못한 열매가 단단한 껍질을 열면 빨간 보석이 수줍게 고개 들고 바라본다. 갑자기 달려든 추억의 꽃가지 하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을 앞에 두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곤혹스럽던 상황처럼, 이 꽃가지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한참동안 머리를 굴렸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추억이 성큼 안겨든다. 아, 생각났다. ‘노박덩쿨’.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예쁜 꽃과 나무들을 지천으로 심어 가꾸고 있는 요즘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골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나의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산과 들에 이름 없이 자라고 있는 무심한 들꽃들이 전부였다. 그 시절, 겨울야산에서 만나는 노박덩쿨은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었다.


  노박덩쿨은 가을을 지나면서 이파리도 떨어지고 물이 마른 가지에는 열매만 남아 쉽게 꺾여진다. 햇살 따스한 겨울 날, 뒷산에서 꺾어온 노박덩쿨을 병에다 꽂아 책상머리에 두면 신선한 바람이 머리를 식혀주는 듯 맑아졌다. 이도저도 시들해져 눈길을 주지 않으면 제 자라던 곳이 그리워서인지 노랗고 빨간 열매는 모두 떨어지고 말라버린 가지만 남는다. 마른가지를 버리고 병에 마지막 남은 물조차 버리고나면 봄이 슬그머니 다가와 있었다.


  아마 그때도 이 무렵이었을 듯하다. 뒷산에서 땔감을 해오시는 아버지의 손에 노박덩쿨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빈병을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정성들여 샘물을 채운다. 꺾어온 꽃가지를 꽂고는 한걸음 물러서서 감상을 하셨다. 배고픈 이 겨울이 어서 물러가고 성큼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그 후 아버지는 내가 노박덩쿨을 꺾어 꽂는 모습을 몇 년 더 보신 후 돌아가셨다.


  겨울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는 날, 모처럼의 산행에서 노박덩쿨을 만났다. 노란색과 붉은 색이 유난하다. 빗물에 젖고 있는 꽃망울들이 애처롭다. 아버지가 안방에 꽂아두셨던 노박덩쿨, 내가 꺾어 공부방 책상 앞에 꽂아두었던 노박덩쿨이 그야말로 덩쿨 채 굴러와 나를 유혹한다. 손을 뻗어 꺾으려다 멈추었다. 다음 산행길에 다시와 오래도록 보리라 마음먹었다. 여전히 고운 노박덩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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