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출발지, 경주
1985년 3월 경주공고에 부임하면서 경주 혹은 경주문단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고향 선산(지금의 구미)의 죽마고우인 조동화 시인이 문화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문인협회에 가입해서 본격적으로 문학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 나가기도 하고, 여러 매체에 잡문들을 가끔 올리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친구의 권유가 고마웠을 뿐 아니라, 능력과 소질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본격적인 문학’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나의 문학인생은 경주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는 경상북도에서 대구가 광역시로 분리되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문인의 수가 가장 많은 경주문협(?)이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문인협회로 내외에 공인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나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문인들과 회의도 하고, 열심히 행사에 참여하면서 나름대로 문학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김종섭 시인 등 경주 문인들의 성원과 지원에 힘입은 결과 1991년에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의 기관지인 〈예술시대〉의 신인상 수필부분에 당선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991년 2월에 나의 근무지가 경주공고에서 포항의 흥해공고로 옮겨간 시점에 경북문협의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포항 MBC에 근무하는 장승재 시인이 회장, 치과의사인 이동주 수필가가 부회장을 맡았다. 문협의 실무 집행자인 소임을 다하느라 목월백일장, 청마백일장 등 전국 규모의 행사를 추진하느라 동분서주했던 일들이 가장 크게 기억난다. 하여간 거주지 경주와 직장인 포항을 오가던 이 때가 내 문학의 기반을 제대로 다진 시기였다.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당시, 가끔 도내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경북문인협회의 위상에 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지금의 경북문협은 명실상부하게 경북을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여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진에서 강진으로 변하는 흔들림을 체감한 장승재 회장이 어느 날 경북문협의 해체를 전격적으로 선언하였다. 곧 이어 경산지역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김윤식 시인을 회장으로 선임하면서 지금의 경상북도문인협회가 만들어졌다. 그 후 내가 관리하고 있던 경북문협 관련 모든 장부들을 새로 생긴 집행부로 인계했다.
1996년 흥해공고를 끝으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던 교사에서 교육전문직인 장학사로 전직하면서 나는 경주를 떠났다. 경주의 김근일, 이동주, 이경만, 채종환, 포항의 김은혜, 영천의 김정식을 비롯하여 경주, 포항, 영천 등지에 살고 있는 수필가들의 뜻을 모아 『서라벌수필문학회』를 창립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내친김에 자랑삼아 나의 문학 활동을 열거해 본다. 경주 보문단지 내에 있는 호텔을 빌려 첫 수필집 〈그리움에 색깔이 있을까〉(1992, 한강출판사)의 출판기념회를 경주 문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개최한 이후, 〈버리고 가벼워지기〉(2008, 그루출판사)를 발간하는 등 현재까지 모두 5권의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한 보훈문학상(1995년), 전국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우수상(2000년)을 받았으며, 과분하게도 경상북도문인협회상(2007년)과 영호남수필문학상(2009년)을 받았다. 이 모두가 경주에서의 출발이 좋았던 덕분이라 믿는다.
경상북도문인협회의 한쪽 끝과 새로운 시작을 함께했던 나의 경주시절은 내 문학의 출발을 상징하고도 남는다. 나에게 있어 경주는 문학의 영양분을 공급해준 어머니의 뱃속 같은 곳이고, 내 문학의 나무가 뿌리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준 고향이다. 〈경주문학〉지면에 출중한 문인들의 작품과 보잘 것 없는 나의 작품을 함께 게재하는 과분한 영광을 누렸다. 경주 문인들과 함께하면서 나름대로 받은 자극이 오늘 내 문학의 원동력이었음을 알기에 경주와 경주의 문인들이 늘 고맙다.
[2011.10.18, 경주문학 5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