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첫 출근일입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습니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눈송이들의 모습이 아주 장관입니다. 흔들리며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으니 꿈결처럼 선배님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동안 마음의 빚을 갚지 못해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만 오늘에사 다하지 못했던 숙제를 하게 됩니다.
도착한 곳은 ‘국립영천호국원’입니다.
사무실에서 받아든 쪽지에 적혀있는 ‘249216’번을 되뇌며 눈 앞 가득 늘어선 빗돌을 향해서 걸음을 옮깁니다. 급한 마음에 경사진 언덕으로 서둘러 오르니 숨이 턱밑까지 차오릅니다. 줄지어 도열해 있는 표지석들과 눈을 맞추었습니다. 백설이 금잔디를 덮고 세상을 덮고 있었지만 난 마침내 찾았습니다. 빗돌에는 『육군상병 김문상 지 묘』가 선명합니다.
맞았습니다.
선배님의 이름석자가 분명합니다. 말이 없는 빗돌에 손을 얹었습니다.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내립니다. ‘제가 왔습니다....’ 여러 번 반복하며 준비해온 인사말의 첫마디 이후 목이 막히고 맙니다. 선배님, 지상은 모처럼 덮인 눈으로 편안합니다만, 그곳도 평온하지요? 후배를 유난히 아끼던 선배님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선배님은 대한민국의 학도병이었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4학년 때라 했지요. 전쟁발발 나흘째인 6월29일에 ‘펜 대신 총을 달라’는 혈서를 써 들고, 65연대 본부로 가서 입대시켜 달라고 떼를 써서 학도병이 되었다던 선배님의 소년 같던 웃음이 떠오릅니다. 8월 29일 다부동에서 쏜 적군의 박격포탄 7발이 신천동 푸른다리에 떨어지자 소개명령이 내려졌고, 부산으로 이전해가는 육군본부를 따라 갔다고 미안해 하셨지요. 동료 학도병들은 안강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는데 나만 살아 미안하다고 하셨던 말씀까지만 기억하겠습니다. 눈송이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눈밭에도 겨울바람은 찹니다.
두 동강 난 비운의 천안함을 기억합니다. 마흔 여섯명의 젊은 생명을 삼킨 그 바다는 오늘도 북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효녀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를 건너온 포탄이 백성의 가슴을 찢었고, 연평도의 평화를 찢었습니다. 낙동강을 피로 물들였던 동족상잔의 흔적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는데 아직도 부족하단 말입니까? 조국을 사랑했던 선배님의 영혼이 오늘도 바람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눈이 옵니다.
사뿐사뿐 내리는 서설이 아니라 아예 폭설입니다. 그날 안강전투에는 하늘 가득 총탄이 쏟아졌다던데, 오늘은 눈송이가 하늘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지상으로 사뿐히 내려온 눈송이가 울타리로 세워진 무궁화 마른 꽃대궁에 내려앉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 강산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선배님, 편히 잠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