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청송 사과

죽장 2010. 12. 28. 17:37

 

  차창 밖 풍경이 곱다.

  무서리에 고춧대는 녹아났지만, 배추는 푸름이 더욱 짙어있다. 빨갛게 익은 사과가 꽃인 양 매달려 있다. 인공미 하나 없는 경치가 도심을 떠나온 나의 가슴을 떨리게 한다. 그러나 가슴이 떨려오는 진짜 이유는 초행길이 주는 기대 때문이다. 

  청송행이다.

  경주에서 가는 코스는 여럿 있지만 고속도로와 국도를 제쳐두고 상옥을 거쳐 부남에 닿는 산길을 선택하였다. 안강을 지나 기계에서 기북 방향으로 꺾어들어 한참을 달리니 성법재가 머리맡에 다가선다. 친절한 네비게이녀(?)는 ‘연이어 급커브입니다’, ‘전방에 낙석주의 구간입니다’를 숨가쁘게 내뱉고 있다.

  억새가 흔들리고 있다.

  울긋불긋한 계곡을 지나온 바람 탓이다. 해맑은 가을 햇살이 건너편 산 칠부 능선에 부서지고 있다. 죽장에서 청하로 가는 쪽을 외면하고 왼편으로 접어드니 늙은 농부 내외가 김장무우를 뽑아내고 있다. 옥수숫대 울타리가 우수수 떨고 있는 작은 학교에 눈길이 꽂혔다.

  학교는 조용하다.

  울도 담도 없는 운동장. 질경이와 클로버가 맞아 줄 뿐 조용하다. 폐교가 된 것도 아니고 방학도 아닌데 아이들은 모두 어디 갔단 말인가. 교무실 팻말이 달린 문을 열었다. 석유난로가 온기를 뿜고 있다. 창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생님이 나의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그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라고 말았다.

  R선생님이었다.

  “여기서 만나다니요, 언제 왔습니까?” “지난 3월에 왔습니다.” 다음 순간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라는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려다가 중간에 멈추어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그 이상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남독녀였다.

  마음씨가 비단같이 고왔을 뿐 아니라 삶의 방식도 튼실했다. 친정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착한 남편과 함께 남매를 낳아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은 세상 행복의 표본이었다. 신의 질투인가. 열 살배기 막내딸을 남겨놓고 멀리 간 것이 벌써 몇 년 전이다. 잘 지내고 있느냐는 질문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쯤은 상처도 아물어 가리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유방암을 확인하려고 서울의 병원을 찾았던 날의 웃음을 기억한다. 털모자를 쓰고, 어떤 날은 마스크를 하고 입 퇴원을 거듭하면서도  삶을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던 여인. 그날, 병실을 나서는 나를 향해 “잘 가세요”하며 소리친 마지막 음성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도 오늘 같이 햇살 맑은 가을이었다. 꽃 같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서도 슬픔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을 이 중년의 사나이. 그동안 마음을 어디다 두고 살아 왔을까?


        1, 2, 3학년이 네명, 세명, 네명.

        전교생 열 한명인 분교장

        조용한 운동장에 하학종이 울린다.

        종소리는 정지된 시간을 헤치고

        산그늘로 흩어진다.


        새움 트는 날 뻐꾹새 종일토록 울다가

        그 사람 무덤 위로 날아갔는데

        어느새 여름 지나 가을이다.

        이 산자락 붉게 물들고 나면 

        첫눈이 오겠지.


        눈은 내려 낙엽 위에 쌓이고

        그 사람 누워 있는 잔디밭에도

        속절없이 쌓이리.


  청송가는 길.

  ‘그냥 지내고 있습니다.’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기 싫었다. 재를 넘어 청송 부남에 도착했는데도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나의 귓전을 맴돌고 있다. 콧노래 부르며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질주해가던 청송길이 R선생님으로 인하여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이 길을 선택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인생길 구비구비에 기분 좋은 일만 있으랴. 속내를 알리 없는 청송사과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서산을 넘어가는 가을해가 청송사과만큼이나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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