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진홍불꽃

죽장 2010. 7. 31. 17:53

 

 

  원래 이름은 'Flame tree'이다.

  사이판상공에 도달한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면서부터 화려한 색깔로 내개 다가온 나무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곳곳에 조경수로 심어져 있다. 진초록 이파리에 주황색 꽃봉오리들이 얹혀있는 형상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기둥은 느티나무처럼 생겼고, 자귀나무를 닮은 이파리에 백합과 분꽃을 합한 모양의 꽃이다. 열대식물 특유의 풍성한 초록이파리와 진홍색꽃의 조화는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때맞춰 내리는 스콜에 젖어 흔들리며 다가오는 희열 그 자체이다. 

  길은 북쪽으로 뻗어 있다.

  야자나무 숲과 나란히 뻗은 해안선을 따라 가니 하얀 비석이 맞아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징병으로 일본에 의해 끌려와 사이판에서 노역을 하거나, 종군 위안부로 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국인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한국인평화위령탑」이다. 뜨거운 햇살을 상관하지 않은 채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일본군 최후사령부가 있다.

  바다를 향한 대포와 전차가 금방이라도 포탄을 쏟아낼 것 같이 살벌하다. 뒤쪽 바위산에는 미국군의 상륙작전 때 맞았던 총포 자국이 선명하다. 큰 바위를 깎아 만든 태평양전쟁 최대의 격전지. 바위도, 대포도 비바람에 깎이고 깎여 한낱 낡은 정물로 변해 있으니 세월보다 더 강한 것은 없나 보다.

  바위가 까마득히 솟아 있다.

  해발 249m의 마피산 정상의 바위에서 수백 명의 일본군 병사와 민간인들이 항복을 거부하며 뛰어내린 「자살절벽」이다. 무서워서 주저하는 사람들은 손과 발을 묶어 뒤에서 떠밀었다고 한다. 그 중 징병으로, 정신대로 끌려왔던 수많은 한국인 젊은 남녀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꽃다운 청춘은 또 어쩌고.

  저 멀리 또 하나의 절벽이 보인다.

  일본인들이 그들만의 방법으로 죽음을 택했던 곳이다.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천황은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4년 여름 어느 날, 수천 명의 군인과 부녀자, 노인들이 줄지어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며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날 이 「만세절벽」도 오늘만큼이나 더웠으리라.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발아래 짙푸른 코발트빛 물결이 태평양을 향해 넘실거리고 있다. 이 바다는 알고 있을 것이다. 저 바위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날 최후사령부를 뒤덮은 포탄연기를 보았을 것이다. 자살절벽과 만세절벽에서 몸을 날리는 생명들의 아우성을 들었을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뜨거워진다. 스콜이 내리면 이 더위를 식힐 수 있을까.

  돌아오는 차창으로 풍경이 스쳐간다.

  녹슬어 바스라져가는 전차,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포신,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마침내 몸을 던진 절벽. 이 기막힌 풍경에 세월을 지켜온 불꽃나무에 진홍빛 꽃이 피어 타오르고 있다. 쇳덩이가 해풍에 시달리며 가루가 된 세월이 흘렀다. 그 날 허공으로 몸을 날린 생명들은 흔적도 없지만, 올 해도 불꽃나무 꽃들은 여전히 진홍빛으로 피어 영혼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후두둑, 스콜이 내린다.

  휴식을 위해 찾았던 남국 사이판에「불꽃나무」가 젖는다. 진홍빛 흔들림이 가슴을 채워준다. 아, 이 비는 슬픈 영혼들에게 바치는 성찬이다. 비바람, 거친 파도에 절벽이 무너져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영혼들이 일어선다. 벼랑 끝 이 자리에 희망의 진홍꽃잎이 날린다. Flame tree! 사이판의 진홍불꽃이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201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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