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불꽃, 진홍빛 영혼

죽장 2010. 7. 29. 11:08

 

 

빗방울이 떨어진다.

제주도를 거친 장마가 남부지방에 상륙한 후 위로 올라오고 있는 영향이라 한다.

중복 더위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발가벗고

온 몸을 씻는 시원한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즐겁다.

사이판에서 스콜에 젖으며 피어 있던 ‘불꽃나무’가 생각난다.

휴식을 위해 찾았던 남국에서의 몇 날이 이 꽃나무로 인해 더 좋았다.

 

원래 이름은 'Flame tree'이다.

사이판상공에 도달한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고도를 낮추면서부터 화려하게 각인된 나무다.

짙은 녹음과 함께 주황색 꽃봉오리들을 잔득 머리에 이고 있는 형상으로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곳곳에 조경수로 심어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쳐다보았다.

기둥은 느티나무처럼 생겼는데, 자귀나무를 닮은 이파리에

꽃의 형태는 백합과 분꽃을 합해놓은 것과 비슷하다.

멀리서보면 붉은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화려하다.

짙은 초록과 진홍색의 조화가 뜨거운 정열이다.

여기에 때맞춰 내리는 스콜에 젖어 다가오는 희열이다. 

 

사이판 북부지역.

여기엔 세계2차대전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녹슬어 바스라져가는 전차,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포신,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마침내 몸을 던졌다는 절벽,

이 모두가 아픔으로 보인다.

여기에 세월을 지켜온 불꽃나무가 진홍으로 타고 있다.

쇳덩이가 해풍에 시달리며 가루가 된 세월,

그 날 허공으로 몸을 날린 생명들은 흔적도 없다.

올 해도 불꽃나무 꽃들은 퇴색되지 않은 진홍으로 피어

영혼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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