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수필] 아직도 무섭나?

죽장 2009. 8. 30. 09:20

아직도 무섭나?


  늦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뜨거운 태양이 서산으로 떨어지는 일몰의 시간. 범종루 앞에는 사물을 관람하려는 관객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범종루 너머 바라보이는 영축산 하늘에 저녁노을이 곱다. 어둠이 깔리기는 아직 이른 시각, 시작한다는 예고도 없이 대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스님의 장삼자락이 양손으로 휘두르는 북채에 맞춰 너울거린다. 북소리는 잔잔한 가락이다가 다음 순간 큰울림으로 변화를 반복하면서 계속된다. 쿵쿵, 딱딱, 쿵쿵딱딱..... 북소리는 마당을 돌아 하늘로 흩어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북장단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대종 앞에는 스님 한 분이 준비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름드리 종뭉치에 정신을 집중한 체 호흡을 가다듬더니 전력으로 다해 밀었다. 그 모습이 날렵하면서도 호기찬 품새는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짐승의 모습 같기도 하고, 삭일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 같이 보였다. 콰앙 아앙-. 콰앙 아아앙-. 내 귀에는 이런 소리로 들렸다. 애끓는 호소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운이 귀에 가물가물해지려는 찰라 또 콰앙 아아앙앙 이잉잉으로 다가와 영혼을 흔들어 주고는 하늘로 흩어진다. 천지를 개벽할 듯한 종소리다.

  포교사님을 따라 자리를 옮긴다. 다리를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잉잉거리는 종소리가 계속 뒤따라오면서 귓전에 맴돌고 있다. 숨을 고르며 올라간 곳에 석탑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콰앙~ 하는 소리가 또 울린다. 분명 환청은 아니었다. 사물을 울리는 행사의 마지막인 대종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나보다. 서른 번 째 콰앙. 서른 한 번 째 콰아앙. 서른 두 번 째 콰아아앙. 서른 세 번 째 콰아아앙앙.

  어둠이 시작된 탑전에는 그림자조차 잦아들었다. 종소리가 그치고 여운마져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주변 분위기가 이 눈에 들어온다. 검푸른 이파리 사이로 처마를 맛댄 통도사 수많은 가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영축산 능선 실루엣이 선명하다. 튀어나온 바위가 손에 잡힐 듯하다. 탑 주변에 퍼질러 앉아 종소리가 사라져간 자리에 돋아날 별무리를 헤아리고 있는 데 전설 같은 ‘호혈석 이야기’가 떠오른다.


  영축산 8부 능선에 자리 잡은 백운암의 깊어가는 밤. 길 잃은 처녀가 새처럼 찾아들어 동침을 요구했다. 도를 깨치려는 스님과 속세의 여인이 비좁은 단칸 법당 피할 수 없는 공간에서 함께 했다. 번뇌를 떨쳐내며 기도하는 스님을 지켜보는 처녀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날이 밝았다. 그날 긴 밤 이후 처녀는 상사병으로 몸져눕게 되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는 죽어 사나운 호랑이가 되었다.

  호랑이는 밤이면 밤마다 영축산 통도사를 종횡무진 주름잡으며 하늘과 땅을 향해 울부짖었다. 통도사 산문의 전 식구들은 저 호랑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는 진정시킬 수 없다는 데 공감하였다. 제각기 소지품 하나씩을 내놓았다. 호랑이는 길을 잃었던 그날 밤의 스님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지사. 호랑이 등에 업혀간 스님은 중요한 남성을 잃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후 호혈석을 통도사 바닥에 내려놓게 되었고 원한을 해소한 호랑이도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천년을 거슬러온 호혈석 스토리. 스님과 처녀의 만남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인가? 속세에서 말하는 운명인가? 처녀는 스님을 사랑했을까? 미워했을까? 상사병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처녀는 한을 품은 호랑이가 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스님이 선택한 그날 밤은 과연 최선이었을까? 스님은 호랑이에 물려가는 순간 도를 깨쳤을까?

  영축산 어둠이 성큼 다가선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처녀호랑이가 나타날 듯하다. 갑자기 달려드는 무서움에 몸을 추스르며 범종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물관람을 마친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아무도 없다. 땅 위에 사는 중생들은 물론이고 공중에서 물속까지 아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극락왕생을 발원해온 사물이 천년을 울렸으니 호랑이도 극락세상 좋은 자리에 머물고 있을 터. 바람을 타고 밀려갔던 종소리가 영축산을 돌아 다가온다. 호랑이 울음 대신 영축산 솔바람소리가 차다. (2009.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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