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내 전부였던 당신

죽장 2009. 5. 26. 17:00

오월도 막바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기다리던 단비가 내려 산천이 한층 싱그러워진 저녁 무렵,
불현듯 고향생각이 나서 차를 내몰았습니다.
마을 앞에 내려서자 무논의 개구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일제히 울음을 시작합니다.
짐작컨대 자주 찾지 않은 데 대한 원망이 아니라, 반가워서 내지르는 환호성인 듯 합니다.

모내기는 아직 이른가 봅니다.
감자꽃이 피어 있고, 완두콩 꼬투리가 여물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오월의 산천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따슨 체온을 느꼈던 시절이 또렷이 살아납니다.

이제 반세기 전의 추억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이 시작됩니다.
녹음 짙은 산골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머니와 아들입니다.
개구리소리 배경음악이 들려오면 무논 스크린이 울라갑니다.
어머니의 잔상이 노쇠해진 심장을 흔드는 북소리로 다가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집안 어디에나 존재하셨습니다.
부엌 옆 맷돌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고,

사랑채 처마 밑의 절구에 메주콩을 찧었습니다.
다리미에 숯불을 피워 주름진 옷자락을 펴주셨고,

호롱불 아래서는 구멍 난 양말도 기우셨습니다.
어디 집안 뿐 입니까.
푸성귀가 자라고 있는 채전,

콩이나 참깨가 자라고 있는 뒷산 언덕배기도 어머니가 주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곧 집’이라는 요즘 어느 광고 카피가 절절이 맞는 말입니다.

그때가 추석명절이었나 봅니다.
보름달이 동산 위에 떠오른 초저녁,

전신에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면서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셨습니다.
왜 여기 나와 계시느냐는 물음에 대답은 않고

앞장서 훠이훠이 걸어가시던 당신의 야윈 그림자가 생각납니다.
7남매가 다 모여도 네가 빠지면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대목장날 읍내의 난전을 돌고 돌아 해 오신 설빔을 차려입고 골목을 나서면
천하가 온통 내 것인 듯 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한 벌이면 엄동설한 추위쯤이야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수제비 나물국으로 끼니를 떼워도 배고프지 않았고,
물려받은 헌책 펴놓고 엎드려 숙제를 하면서도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이 아들이 전부였듯이 저에게도 어머니가 전부였습니다.

어머님!
뒷산언덕배기에 할미꽃으로 살아 계십니까?
논두렁에 메꽃으로 돋아나셨습니까?
짧은 인생처럼 피었다가 금방 지는 꽃이 싫어 혹 먼 산 뻐꾸기 울음으로 살아 계십니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되어 여기 머물고 계십니까?
어딘가에서 반색하며 나타나실 것만 같습니다.
침침해진 눈을 부릅떠봅니다.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려 머리를 갸웃거려 봅니다.
한 조각 메아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귓바퀴에 손바닥을 보태어 봅니다.

          잘 자란 보리밭
          저녁노을이 곱습니다.
          어머니를 불러보지 못하고
          오월 한달을 보낼 뻔 했습니다.
          오늘, 고향을 찾아와 회상하노라니
          어머니가 더욱 그립습니다.
          어머니, 이렇게 찾아올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2009.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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