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아버지 회상

죽장 2009. 5. 8. 17:59

  아버지는 예순 아홉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아직 스무살 언덕 아래에 머물러 있던 소년이었다. 객지의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이따금씩 찾아간 고향이었기에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래야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가 전부이다.

 

  아버지의 외모는 이랬다. 코밑과 턱에는 검은 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이마와 볼에는 주름이 많았으며, 항상 근엄한 표정이셨다. 가끔씩 턱수염을 스다듬어 내리는 모습이 기억난다. 흰색의 무명 바지·저고리와 양쪽에 호주머니가 붙은 회색조끼가 유일한 평상복이었다. 오릿길 거리의 면소재지에 오일장이 서는 날을 포함하여, 특별한 나들이나 행사에 가실 때는 반드시 흰색 두루마기에 망건과 갓을 쓰고 집을 나섰다.

 

  장신구로는 내 팔 길이 쯤 되는 담뱃대가 입에 물려 있거나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조끼주머니에는 세 번 접어 손바닥만한 지갑과 담뱃불용 부싯돌이나 작은 성냥통이 들어 있었다. 담배이파리를 잘게 썰어 만든 담배가 지갑 깊숙이 들어 있고, 입구에는 소중한 지폐가 들어 있는 듯 했다. 그 외에 마치 여름날 늘어진 소불알처럼 덜렁거리는 안경집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에 효자로 선정되어 상장과 부상으로 놋그릇 한 벌을 받으셨다. 가문의 영광인 그 상의 수여자가 지서장인지, 면장인지는 기억에 없으나, 아버지는 내심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다. 수상 직후 동민들이 마을 입구에 효자문을 세워주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한사코 거절하셨다고 한다. 초가집 그을린 처마밑 기둥에는 아버지께서 받으신 그 상장이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다.

 

  또, 정확하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숯불을 피워 대나무를 구부리고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꿰어 옷걸이를 만드는 수업을 학부모에게 공개하는 날이었다. 여러 어른들이 복도에서 창 너머로 교실 안을 기웃거리는 듯하자, 나는 까닭없이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집에서 누가 왔는지도 몰랐지만 나중에사 아버지께서는 창 너머 있는 쪼무래기들 중에서 네가 금방 눈에 들어오더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부모님은 이날 딱 한번 학교에 오셨을 뿐이다. 

 

  아버지는 정말 어떤 분이셨을까? 꾸중 한번 듣지 않았는데도 늘 무서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결코 인자하다거나 자상하셨다는 기억은 없다. 그러나 보지 않는 것 같은 데도 자식을 깊이 이해해주셨던 아버지였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어른이었지만 나를 믿고 있었다.

 

  가정의 달 오월, 그 중에서도 어버이 날을 맞아 저승에 계신 아버지를 회상하는 이 글이 행여 아버지를 자랑하는 내용으로 보일까 걱정이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자랑, 마누라자랑은 팔불출이라 했지만 아버지자랑은 팔불출에도 끼지 않을 것이니 어떠랴. 또 아버지 얘기만 했다고 곁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섭섭해 하실지 모른다. 엄마, 엄마얘기는 다음에 꼭 할께요.

[200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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