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오월

죽장 2009. 6. 9. 14:02
 오월


  야영수련을 하는 학생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 산에는 찔레꽃이며 아카시아꽃이 만발해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날아온 꽃향기가 가슴을 채워준다. 자연의 향기를 마신 얼굴로 초목들을 바라보니 모두가 꽃이 되어 손을 흔들어 반겨준다. 꽃처럼 아름답다.

 

  오월의 산을 바라보면서 말을 잊은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온 산을 내려다 내려다보며 감동하고 있는 나와 녹음으로 우거진 산꼭대기를 향해 지칠 줄 모르고 나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을 오르다 개울 옆에 자라고 있는 두릅나무를 보고 이 나무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대답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산에서 자라고 있는 초목들을 잘 모르고 있거나 무관심함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솔길 옆 빗돌도 없는 무덤 뜰에 둥굴레가 수북히 자라고 있었다. 휘어진 줄기에 긴타원형의 부드러운 이파리가 청순한 모습이다. 대나무순처럼 올라오는 어린것은 나물로 먹기도 했다지만 근래에는 뿌리를 가지고 건강에 긴요한 약재로, 더러는 마시는 차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파리 아래를 자세히 보면 종모양의 회백색꽃이 여럿 달려있다. 우리가 정원에 꽃을 심어 가꾸듯이 묘의 주인도 자신의 뜰에 둥굴레를 키우고 있었다. 긴 세월을 희노애락을 초월한 채 맛과 향이 좋은 둥굴레차를 마시며 말없이 누워있다.

 

  정상 부근의 짙은 그늘 아래 취나물이 자라고 있었다. 취나물이라도 산 아래에서는 잎이 작은 것들만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깊은 산 속이라 그런지 손바닥보다 더 넓은 크기로 부드럽게 자라있었다. 취나물은 참취, 곰취, 미역취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독특한 향기로 입맛을 돋구는 데는 그만이다. 요즘은 재배하는 취나물도 있지만 맛과 향이 산에서 뜯은 것만 못하다. 입맛 없는 봄 식탁에 오른 취나물의 쌉쌀하게 감치는 맛을 생각하니 군침이 돈다.

 

  햇볕이 잘 드는 언덕에 고사리가 자라고 있었다. 고사리를 꺾어들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생긴 풀 부근에 가면 지금 막 올라오고 있는 고사리순이 있을 것이니 찾아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이내 아직 피어나지 않은 고사리를 꺾어왔다. 고사리는 주로 비가 오고 난 후 새순이 돋아나는데 이 때 꺾어 삶아서 말려두었다가 나중에 불려 양념을 하여 먹으면 맛이 아주 그만이다. 제사상에 필수적으로 오르는 것을 볼 때 아마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둥굴레며, 취나물이며, 고사리를 열심히 설명하지만 아이들은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해마다 춘궁기인 이맘때는 보리고개를 넘느라 반찬 가릴 틈이 없었지만 어쩌다 밥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는 날도 나물보다는 고기반찬에 젓가락이 많이 갔다. 나이를 먹으면서 식성이 변했는지 고기보다는 채소를 더 즐겨 찾게 되고 채소 중에서도 산나물 같은 것을 더 좋아한다. 이 아이들이 이런 입맛을 깨닫게 되려면 아마 내 나이쯤이나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이지 직접 산나물을 뜯을 수 있는 어른들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수입된 화초보다 자연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들꽃을 즐겨 심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니 산나물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따라서 높아졌으면 좋겠다. 눈에 띄는 것 한 두가지에라도 그윽한 눈길을 보냄으로 해서  이 땅에 자라고 있는 초목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라는 인식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저기, 무덤 속에서 사시사철 날이면 날마다 취나물과 고사를 먹고 둥굴레차를 마시고 있는 어른의 눈에도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가 퇴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오월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슴이 열린다. 온 겨울을 참고 기다리던 바람이 겨울의 강을 건너 이쪽 봄 언덕에 닿으면 기다리고 있던 초목들이 환영의 춤을 춘다. 뿌리에서 줄기로 올라오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아름다운 새싹을 본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고 있는 녹색의 섭리 앞에서 마음이 경건해진다. 싱싱한 오월의 산에는 싱그러운 바람이 산마루를 넘어와 주인 모를 묘지 앞에 머물고 있다. 여기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와 꽃들을 사랑하고 싶다. 이들을 키우고 있는 바람과, 햇빛과, 대지를 사랑하고 싶다. 연두색 산야가 녹색으로 물들어가는 계절. 찔레꽃, 아카시아꽃 향기 가득한 오월의 바람. 그리고 둥굴레가 자라고 두릅이며, 고사리, 취나물이 자라고 있는 이 찬란한 오월의 풍경 속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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