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돌잡이에게 배운다

죽장 2009. 4. 20. 16:57
  외손자 주형이의 돌잔치.

  이 날 초대받은 손님으로는 친가쪽 조부모와 외가쪽 조부모, 그리고 이솔이네 가족이 전부였다. 낯이 익은 사돈어른들이야 당연하다 치지만 이솔이와 이솔이 아빠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이솔이는 주형이 보다 백일이나 늦게 태어난 아이로, 엄마끼리는 친구지만 아빠는 키가 큰 미국인이다.

 

  이솔이.

  그 녀석은 동서양인의 특징이 적당히 혼합되어 있다. 머리칼은 노랗지만 눈동자는 크고 까맣다. 피부색은 하얗다. 그냥 하얀 것이 아니라 우리네 하얀 피부와는 확연히 다른 하얀색이다. 나도 모르게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이솔이에게 눈길이 자주 갔다.

 

  돌상이 거나하게 차려졌다.

  오색무지개색깔의 한복에다 복건을 쓴 채 돌상 앞에 앉아 있는 표정이 어젓했다.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는 팥고물시루떡 너머에 실타래, 의사봉, 청진기, 연필을 비롯하여 쌀과 돈이 보였다.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판검사, 의사, 학자와 같은 전문직업인이 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기를 소망하는 뜻이리라. 그 외에도 마이크, 컴퓨터마우스, 골프채까지 눈에 띄었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빌 게이츠 같은 프로그래머, 세계적인 프로골퍼가 되기를 소망하는 세태의 반영이리라.

 

  갑자기 주형이가 걸어 나왔다.

  녀석은 상 앞으로 다가가 뭔가 줍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른들의 마음을 외면하고 뚜벅뚜벅 걸어 이솔이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잠시 눈을 맞추고는 듯 하더니 서로 덥석 껴안는 것이었다. 말을 하질 못하는 녀석들이기에 표정으로 봐서는 첫돌을 축하한다거나 친구야, 고맙다는 뜻을 주고받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저절로 터져 나온 박수가 장내를 진동시켰다.

 

  가족끼리 모인 돌잔치.

  형식도 없고 절차도 무시한 조촐한 행사였지만 돌잡이의 행동이 시사하는 바는 실로 작지 않았다. 미래의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민족이 달라도 언어가 통한다. 나라에는 국경이 있지만 우정에는 그 어떤 장벽도 없었다. 돌잡이들이 펼쳐갈 세상에는 직업이나 경제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소통이 중요하다.

[2009.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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