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비밀번호

죽장 2008. 8. 20. 10:01

아침 출근시간.

아파트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호주머니에 든 보턴을 누르면 시동이 걸린다. 잠시 예열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전자수첩을 꺼내어 보턴들을 터치하면 오늘의 주요 일정이 화면에 떠오른다.

 

사무실로 들어선다.

책상서랍을 열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의 전원스위치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윙하고 시스템이 움직이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비로소 바탕화면이 나타난다. 맨 처음 인터넷에 접속한다. 내 메일에 들어가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밤사이에 들어온 메일들을 일별한다. 온갖 스팸들로 만원인가 하면 필독해야 하는 청구서나 읽고 싶은 반가운 메일들도 눈에 띈다. 청구서를 보려면 따로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인터넷뱅킹으로 계좌이체 시키려면 인증서암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다음 과정이 진행된다. 받을 사람의 계좌 번호며 금액을 입력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불블로그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카페에 들어가 본다. 당연히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나서야 어떤 손님이 다녀갔는지, 누가 댓글을 남겨 놓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답변할 필요가 있는 질문은 없는지 샅샅이 살펴본다. 카페 회원들이 올려놓은 글을 읽으며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할 차례다.

전자문서시스템에 들어가 기안을 하거나 결재를 하려면 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일하는 틈틈이 인터넷 검색이나 메일을 확인하거나 불로그나 카페에 들락거리노라면 시간이 초스피드로 지나간다. 휴대폰을 가까이 두고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퇴근시간.

비밀번호를 누르면 현관문이 열린다. 텔레비전 리모콘을 누르며 이리저리 선국하는 사이 압력밥솥에 눌러둔 예약보턴으로 인하여 취사가 완료되었음을 알려온다. 

 

잠자리에 누우면서 생각해본다.

오늘 하루 내가 누른 보턴이나 입력한 비밀번호가 몇 개인가? 인터넷에서, 자동차에서, 집에서 내가 기억하여 두드리고 눌러야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몇 개인가? 내일은 또 무슨 비밀번호를 만들고, 몇 개의 보턴을 눌러야 할까? 나는 몇 개의 아이디를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저께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려다가 비밀번호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얼굴이 붉어졌던 일을 기억하며 잠이 든다. 이러다가 비밀번호 홍수에 밀려나거나 비밀번호에 묻히지는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