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원고와 자료

짝퉁에 무너진 사내, 짝퉁과 손잡다

죽장 2008. 1. 18. 09:32

● '에스보드' 개발·판매 강신기 사장
중국산 짝퉁 저가공세에 매출 100억→20억 급감
제재 노력도 허사 국내 공장 문닫고 아예 中업체에 하청 줘

일명 '짝퉁'이라고 불리는 위조상품을 신고했을 경우 지급되는 '위조상품 신고포상금 제도'가 소액 위조상품 신고도 포상금이 지급되는 등 올해 1월 1일 개정돼 새롭게 바뀐다.뉴시스 1월 2일 보도

서울 금천구 가산동 (주)슬로비의 사무실. 사무실로 들어가는 복도 한쪽에는 바퀴가 두 개만 달린 스케이트보드인 '에스보드'가 전시돼 있다. 하지만 전시된 제품들은 이 회사에서 만든 게 아니다. 슬로비에서 특허를 보유하고 제조·판매하는 에스보드(Essboard)를 베낀 '짝퉁 에스보드'들이다.

이 회사 강신기(49) 사장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중국산 짝퉁으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며 "나와 직원들이 이 모조품들을 보고 더 분발하자는 뜻에서 복도에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짝퉁 피해로 인해 매출이 급감하면서 인천에 있던 공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짝퉁을 만들던 중국 회사 가운데 한 곳을 골라 아예 위탁생산계약을 맺었다. 촉망받던 중소기업이 '짝퉁 업체'와 동침(?)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노숙자 출신 사장의 꿈

강신기 사장은 노숙자 출신이다. 돌침대 사업을 하다가 IMF 여파로 빚더미에 앉게 된 강 사장은 2000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4개월간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던 그를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이디어'였다.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는 스케이트보드와 비슷하면서도 바퀴 2개만으로 추진력을 얻어 나가는 '에스보드'.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직접 묘기를 선보이며 홍보에 나섰다. 결국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15억원을 지원받게 되면서 꿈은 현실이 됐다.

2004년 5월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최신 발명품 전시회인 'INPEX 2004'에서 에스보드는 대상을 비롯해 5관왕을 차지했다. 노숙자 출신 CEO의 성공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강 사장은 지난 2005년 국정홍보처가 만든 공익광고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 에스보드를 들고 사무실 앞에 선 강신기 사장. 강 사장 옆에 진열된 물건들은 직원들과 함께 직접 적발한 중국산‘짝퉁’들이다. /조정훈 기자

◆힘겨운 짝퉁과의 전쟁

이 회사가 시제품의 단점을 보완해 본격적으로 상품을 내놓은 것은 2006년. 레저 열풍을 타고 에스보드는 인기를 끌었다. 2006년 한 해에만 10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에스보드에 대한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며 시장 공략에 나설 무렵 '짝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6년 5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중국에서 모조품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외에서 특허를 받는 데에만 2억원쯤 들었죠. 하지만 짝퉁도 에스보드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별다른 조치를 할 생각은 못 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회사의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 더 급하기도 했고요."

그게 화근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에스보드가 인기를 끌자 중국산 모조품은 무섭게 쏟아져 들어왔다. 소비자가 15만4000원인 제품을 베낀 짝퉁들이 인터넷에서 7만~8만원에 팔려나갔다. 우유 회사나 학습지 등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는 회사들은 중국산 '짝퉁 에스보드'를 2만~3만원에 구입해 판촉용으로 엄청나게 뿌려댔다.

2007년에 국내에 들어온 모조품만 40여만 대. 슬로비 측은 짝퉁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본격적으로 '짝퉁 없애기' 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명품의 상표를 베낀 모조품은 단속이 상대적으로 쉽지만, 특허를 침해한 모조품은 일일이 소송 절차를 밟아야 했다. 지난해 슬로비가 짝퉁과 관련해 벌인 소송만 50건. 8억원을 소송 비용으로 쏟아 부어야 했다.

다행히 관세청에서 단속을 강화하면서 컨테이너 단위로 들여오던 짝퉁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부품으로 들여와서 조립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모조품의 폐해는 이어졌다.

짝퉁에 시장을 잠식당하면서 2006년에 100억원에 달했던 슬로비의 매출은 2007년에 20억원으로 급감했다.

◆적과의 동침(?)

지난해 4월 중국 이우(義烏)의 푸텐(福田)시장(이우국제상무성)을 찾았던 강 사장과 회사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무려 30여 군데가 '짝퉁 에스보드'를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무역업자들을 상대로 물건 수주까지 받고 있었다.

"한국의 무역업자들의 주문을 받아 모조품을 만들던 업체들이 중국 내 시장이 커지니까 아예 홍보 부스까지 설치하고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강 사장은 업자들에게 "내가 에스보드의 특허권자"라며 "에스보드를 흉내 낸 짝퉁을 만들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이들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고민하던 강 사장은 결단을 내렸다. 매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회사의 상황을 감안해 인천에 있던 공장 문을 닫기로 했다. 대신 중국에서 '적발'했던 짝퉁 업체 가운데 규모나 재정적인 면에서 안정적인 한 회사와 정식으로 위탁생산 계약을 맺었다. 정품 수준에 못 미치던 제품의 품질 향상을 위해 직원들을 파견해 부품과 생산 공정을 바꿨다. 그리고 중국 내에서는 별도의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하고 이익을 나누기로 했다. 중국 내 카피 제품에 대한 단속도 일임했다.

강 사장은 "신기술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짝퉁과의 싸움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며 "오죽하면 짝퉁을 만들던 업체에 하청을 주겠느냐"고 말했다.

◆한국기업 짝퉁 피해만 17조원

'짝퉁'으로 불리는 모조품의 범람은 심각하다. 세계관세기구(WCO)의 2004년 기준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교역량의 7%(5120억 달러)가 모조품에 의한 교역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중국 모조품이 67%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이 2006년에 입은 짝퉁 피해만 해도 124건. 상표침해가 55건으로 가장 많았고, 디자인 30건, 특허실용신안 19건, 저작권 8건 등의 순이었다. 그중 중국에서 발생한 건수가 88건이나 됐다.

중국산 모조품으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국내에서는 2006년 말 무역관련지식재산권보호협회(TIPA)가 출범했다. 기업들이 갖고 있는 지적재산권을 보호하자는 취지다. 기업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도 어렵고, 제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삼성전자, 현대모비스, LG전자 등 12개 기업이 회원사로 활동 중이다.

무역관련지식재산권보호협회(TIPA) 이상인 사무국장은 "2006년 한 해만 짝퉁 상품으로 인해 한국의 수출 상품들이 입은 피해가 17조원에 이른다"며 "중국산 짝퉁 때문에 사업을 접는 중소기업이 늘어나고 있어 국가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