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친구와 전우

죽장 2007. 6. 7. 14:06

 

  영화 『친구』가 생각난다. 80년대 초에 사라진 교복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는가 하면,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다’며 또래들 간의 의리를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는 한동안 친구 신드롬을 만들기도 했었다. 학교에서는 훔친 플레이보이지를 보는가 하면, 이소룡 흉내를 내며 의기투합되는 그런 사이가 경우에 따라서는 젊음이고 낭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학교에서 접하게 되는 상황은 교실에서 서로 도와 공부하고 운동장에서 함께 뒹굴며 성장해가는 교우라기보다는 내신 성적을 두고 치열하게 앞뒤를 다투는 경쟁상대자가 친구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존경하는 K선배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낙동강 건너에서 쏜 북한군의 곡사포가 대구 시내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교문을 뛰쳐나와 학도병이 되었다고 했다. 유학산 기슭, 이름모를 산골짜기에서 가슴에 포탄을 맞은 전우는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수통을 건네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전우의 가슴에서는 유월의 햇볕보다 더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며 그날을 회상하였다.

 

  유월이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오늘 또 한번 연례행사와 같이 현충일을 맞았다. 대구에서 군위·의성 쪽으로 가려면 유학산이 있는 다부동을 지나게 된다. 우거진 녹음 속에 말없이 서있는 전적기념비를 바라볼 때마다 그해 유월의 역사를 상기한다. 국군 제1사단과 미군은 T-34전차를 비롯하여 각종 화기를 앞세운 북한군 3개 사단과 맞서 우리 지역 대구를 지켜내었다. 피아의 구분도 없고, 밤낮의 시간도 없이 밀고 밀렸던 격전의 현장 다부동에는 지금도 피내음이 나는 듯하다. 싱그러운 유월의 녹음 속에 떠도는 전우들의 영혼이 머물고 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놀러 다니는 나를 불러놓고 들려주신 말씀이다. 한 사람이 돼지를 잡아 짚멍석에 말아 지게에 지고 밤늦게 친구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어쩌다 실수로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사람마다 회피하였는데, 단 한 사람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한다. 두 사람 사이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신뢰의 강물을 누가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 아버지는 그런 사람, 그런 친구를 몇 명이나 가졌느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친구는 누구인가? 어릴 적 고향 동무, 함께 공부한 동료, 고된 군사훈련을 함께 받았던 사람들, 사랑하는 이성, 이들이 진정 나의 친구인지 생각해 보자. 비록 살인을 한 사람이지만 친구를 믿고 도와주겠다며 선 듯 나서주는 그런 사람을 몇이나 친구로 가졌는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피보다 진한 한 방울의 물을 건네줄 전우가 있는가? 전우 같은 친구, 친구 같은 전우가 내 곁에 몇이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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