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완두콩 연가

죽장 2007. 5. 28. 22:09

  어제는 지방의 한 중소도시에 용무가 있어 갔었다. 마침 자투리 시간이 있어 그 곳의 재래시장에 들렀다. 장꾼도 별로 눈에 뜨지 않는 시각이라 그런지 참외, 토마토가 졸린 눈을 껌벅거리며 좌판을 지키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과일보다는 풋마늘이며 배추에 눈이 갔다. 그러나 내 눈길을 놓지 않는 것은 양파 옆에 있는 완두콩이었다. 완두콩 두 자루를 아주머니가 요구하는 값을 치루고 차에 실었다.

 

  나이가 들면서 성인병을 걱정하는 아내는 쌀밥만 먹는 것이 좋지 않다며 갖은 잡곡을 들여오기도 하지만 내 입맛에는 콩을 섞어 먹는 것이 가장 좋았다. 제철에 산 완두콩을 까서 냉장실에 넣어두고 밥 할 때마다 조금씩 넣으면 일년 내내 완두콩밥을 먹을 수 있어 좋다.

 

  저녁 식사 후 아내와 마주 앉아 콩보따리를 풀었다. 콩꼬투리를 손톱으로 가르면 연두빛 콩알이 가지런히 들어있다. 누렇게 익어 단단해진 것은 까서 모으고, 덜 여문 꼬투리는 옆으로 슬쩍슬쩍 밀어내어 따로 모았다. 삶아서 먹을 요량이었다.

 

  솥에서 김이 나면서 구수한 냄새가 아파트 안에 가득 번져간다. 뿌연 김과 함께 다가오는 콩냄새가 추억의 창고 문을 열고 싱그러운 초여름 들판으로 나를 안내한다. 완두콩 냄새가 타임머신인 양 달려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향마을로 인도한다.

 

  땅 속에서 자주감자, 흰감자알이 굵어가는 초여름. 보리밭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누런 물결을 만들며 미루나무 그늘을 빠져나간다. 강 언덕에는 온 동네 소들이 모두 나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송사리를 쫒아 냇가를 휘젖다가 그도 지겨우면 벌거숭이로 모래밭에 드러눕는다. 뭉게구름 흘러가는 하늘, 태양은 어느 새 서산위에 걸려 있다. 완두콩 익는 무렵의 고향풍경이고 나의 자화상이다.

 

  삶은 완두콩을 내왔다. 꼬투리 채 입안에 넣어 앞니로 물고 천천히 당기면 콩알만 입안에 남는다. 씹을 것도 없이 입안에서 저절로 어개어진다. 왜 하필이면 이 때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 깊게 패인 주름살에 앞니가 몽땅 빠진 어머니. 몇 낱 안되는 머리칼에 겨우 찌른 비녀가 뒷꼭지에서 데롱거리던 어머니. 비에 젖고 땀에 절은 적삼은 삼베 본래의 색깔이 아니라 가난으로 얼룩진 남루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그런 얼굴로, 그런 옷을 입고 아들 공부를 시켰다. 아들이 장성하여 그 분의 참모습을 이해할 나이에 이르렀으나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완두콩을 삶아 먹으며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저세상에 계시는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아마도 주린 배를 움켜쥐면서도 완두콩 하나 아까워서 변변히 잡수지도 못했을 어머니가 보고 싶다. 아내가 내 눈물을 알아차리는 게 창피하여 콩꼬투리 하나를 쥐고 슬며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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