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아들이 사려져 가고 있다

죽장 2005. 10. 18. 13:43

  추석이 지난 후의 산행에서는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날 수 있다. 들국화가 찬바람에 더욱 함초롬해져 있고 황금빛 들판 위를 나는 잠자리들도 한가롭다. 푸른 잎들은 영원한 푸르름으로, 단풍 든 이파리들은 성숙하게 변화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청설모며 다람쥐 녀석들은 분주하게 나무를 오르내리며 겨울채비가 한창이다. 고즈넉한 산등성이 주인 모를 무덤 뜨락에 따슨 햇살이 머물고 있다. 이렇게 가을 산길 굽이굽이에는 결실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부지런함이 있고 평온이 있음을 느끼며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계속한다.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씻노라니 낙엽 쌓인 도랑 옆에 허물어진 무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축대는 여름장마의 흔적이 그대로 인데, 서늘한 바람에 제멋대로 자란 잡초가 흔들리고 있다. 무덤을 돌볼 자식이 없어졌거나, 자식이 있더라도 조상의 산소에 벌초하는 일을 포기한 형상이었다. 세월이 조금 더 흘러 잡초 무성한 저 땅에 나무가 자라고 봉분이 무너져 평지가 되고나면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은 완벽하게 없어질 것이다. 인생은 여기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나는 손님 같은 것이라 생각하니 달콤하던 가을바람이며 따스하던 햇살이 일순 쓸쓸함으로 바뀐다.

 

  하기사 명절이면 유명호텔에서 음식을 주문하여 차례를 지내는 상황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는가 하면, 벌초를 대행해준다는 광고가 전혀 낯설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늙고 병들어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를 학대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도 주변에 흔히 있는 일 중의 하나쯤으로 여기며 무덤덤하게 일상사를 계속하고 있는 요즘이다. 고향과 선산을 지키면서 살거나 명절과 제사를 빠짐없이 챙기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며, 부모에 대한 효도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가르침에 밑바닥부터 균열이 생겨 산산조각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아스라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앉아 숨을 고른다. 참으로 많은 것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이 없어졌다. 진달래를 꺾고, 들판을 뛰놀고, 또래끼리 몰려다니던 곳, 조부모에 부모에 삼촌들까지 한울타리 안에서 옹기종기 살아가던 고향은 사라지고 없다. 자식을 많이 낳지 않으니 형제자매가 없어질 것이고, 뒤이어 고모며, 이모가 없어질 것이다. 고향은 태어난 산부인과 병원이며, 집집마다 왕자 아니면 공주가 된 아이들은 독불장군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저조하여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이 심각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출산장려책을 시급하게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 증가, 가족계획에 따른 출산력 감소, 자녀 양육비 부담의 증가, 어른들의 여가활동 욕구 증대 등이 각각 제몫을 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원인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의존도 약화와 가치관의 변화이다. 부부 둘이서 즐겁게 살면 되지 자식은 없어도 좋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아들, 그것이 꼭 필요한 존재인가에 대한 회의가 팽배해져 꼭 아들을 낳아서 가문의 대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고, 반드시 노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졌고, 자녀에게 의존할 생각을 하는 부모들도 사라져가고 있다. 또 사람이 죽고 나면 여태까지는 주로 매장을 하였으나 앞으로는 화장하는  문화가 보편화될 것이다. 벌초를 하지 않고 그냥 묵는 묘들은 더욱 늘어날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래서 도무지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다는 사고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자식이며 아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고향이며 친구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흘러야 할 인정이 사라져 가고 있다. 다만 사라져 가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또 상당부분을 체념하면서 편안하게 가을 산에 올라야 하겠다. 그래도 결실이 있는 가을은 풍요롭고, 단풍이 있는 산천은 아름답다. 사색이 있는 인생은 여전히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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