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옛 사랑의 그림자

죽장 2005. 10. 17. 08:59
 

  남원의 성춘향.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변사또였지만 열여섯짜라 소녀의 사랑만은 꺾을 수가 없었다. 동헌마루에는 생신잔치상이 질펀하게 차려졌고 마당에는 산발한 여인이 축제의 제물로 바쳐질 시간을 기다리며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맞으리라 체념하고 있는 그녀 앞에 기적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바라보니 그분은 수청 들기를 원하는 또 하나의 탐관오리가 아니라 저승에서 만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낭군이 아니었던가.

 

  ‘암행어사 출또’가 잔칫상 상다리를 흔드는 순간이 춘향전의 백미이다. 어릴 때는 골목길을 내닫으며 육방사령들의 목소리를 목이 터지도록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자라면서는 성춘향과 이몽룡이 만들어가는 달콤한 사랑이야기에 흥분하며 사춘기를 보내었다. 그 후에도 광한루에 부는 봄바람이 수양버들 가지를 흔들 때마다 춘향이가 쟁취한 사랑의 승리는 여전히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나에게 있어 춘향전은 사랑에 관한한 변치 않는 고전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훨씬 더 전인 1586년에 씌여진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머리카락과 삼끈을 섞어 짠 한 켤레의 미투리가 경상도 안동지방의 땅 속에 묻혀 있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31세에 요절한 남편에게 ‘가시는 길에 읽어 보시라’며 관 속에 넣어 둔 한 여인의 편지가 묘지를 이장하던 도중 발견된 것이다.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 함께 죽자 하셨는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살 수가 없어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편지 보시고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라며 남편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을 적어 묻었다.

 

  또 충남 공주의 수촌리에 있는 사적 460호 무덤 5기중 2기를 2003년에 발굴하였는데, 피장자의 머리맡에서 부러진 유리 관옥이 1점씩 나왔다.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관옥이 한 점씩만 발견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연구원이 두개를 맞추어 보니 딱 들어맞았다. 전체길이 5.4cm, 지름 1.2cm의 것을 칼이나 망치 등으로 자르지 않고 전체의 절반 크기인 2.7cm로 손으로 뚝 잘라 무덤에 넣은 것이 분명했다.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남자의 무덤이 10~20년 앞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짐작됨에 따라 먼저 떠난 남편의 무덤에 관옥을 부러뜨려 절반을 넣고, 훗날 자신의 무덤에 나머지 반을 부장품으로 넣게 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남편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안동의 편지 주인공은 청구영언을 통해 시조문학에의 남다른 자질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황진이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진솔한 표현이 황진이의 시조 못지않게 가슴에 와 닿는다. 또 관옥이 출토된 공주의 4호분에서는 금동신발과 둥근 고리장식이 달린 칼이 발견되었으며, 5호분에서는 관이나 칼은 없고 17점의 장식용 구슬이 발견되어 부부의 무덤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옛 사람들의 마음을 오늘의 거울로 들어다 본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봄 언덕 양지바른 봉분을 헤치고 돋아나는 들풀 같은 것이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사랑이니 꿈에라도 나타나 달라고 애원하는 마음, 연기도 없이 타오르는 지어미의 애간장이 봄이면 봄마다 피어나는 들꽃 같은 것이다. 더구나 남편의 무덤에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넣는 안동의 여인이나, 가슴에 품고 있던 관옥을 죽어서까지 간직하고 싶어 했던 공주의 여인은 다 같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어머니들이고 여인들이 아닌가.

 

  목숨을 걸고 쟁취한 춘향이의 사랑이며, 남편의 무덤에 넣어 둔 여인네의 편지며, 무덤 속의 관옥에 흐르고 있는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으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있는 사랑과는 그 코드가 다른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벽이 고금 사이에 가로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요즘 남녀들이 엮어가는 사랑이야기가 다시 수 백 년의 세월이 흐른 훗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려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지난날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이 결코 동일할 수 없기에 미래의 사랑은 그 모습을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광한루 봄바람 맛이 달콤한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안동과 공주고을에 살았던 실존의 인물들이 기록하고 남겼던 마음은 여전히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절실한 설레임이다. 옛 사람들이 만든 희미한 사랑의 그림자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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