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감귤꽃향기

죽장 2019. 6. 17. 16:54

  감귤농사꾼 H씨는 연락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얼굴로 나타났다. 손에는 조생종 제주감귤 한 박스가 들려 있었다. 귤은 품종개량을 하고 재배기술을 향상시킨 덕분에 6월 초여름인데도 아주 달았다. 귤 농사가 있어 아들 딸을 어렵지 않게 대학까지 공부시켰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대학나무였던 셈이다.


  예전에는 감귤농사가 결코 대접받는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감귤은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으로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담당 관리들이 일일이 감귤나무 수를 기록하고 그 수확물을 거두어 한양으로 보냈다. 심지어 초여름에 핀 감귤꽃의 수를 새어두었다가 겨울에 그만큼의 감귤을 거두었는가 하면, 감귤이 많이 열린 해를 기준으로 해마다 똑같은 양의 감귤을 내놓으라 했으니 감귤 수탈로 인한 농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해서 받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하여 관리들 몰래 뿌리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나무둥치에 구멍을 뚫어 후춧가루를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진상제도가 폐지되자 농민들의 무관심과 함께 감귤나무는 버려지고 말았다. 아예 보고 싶지도 않은 지긋지긋한 나무가 되었다. 
 

    

  오늘날 지역 특산품으로 제주도민의 소득에 기여하고 있는 감귤은 지난날에는 아픔이었지만 그 아픈 역사를 딛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 청견과 폰칸의 교배품종인 ‘한라봉’을 시작으로, 한라봉과 온주밀감을 교배시켜 주황빛이 진한 ‘레드향’을 만들었고, 한라봉과 오렌지를 교배시켜 하늘이 내린 향기를 지닌 ‘천혜향’을 얻었으며, 다시 한라봉과 천혜향을 합쳐 속껍질이 얇은 ‘황금향’을 만들었다. 


  H씨는 남 먼저 ‘한라봉’ 농사를 짓더니, 이제는 ‘천혜향’을 생산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 감귤향기가 짙어지는 유월이 오면 살맛이 난다고 한다. 열매가 주황색으로 짙게 물들어가면 그의 얼굴도 과일 빛이 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가 생산하는 ‘천혜향’ 속에는 억지 농사를 지었던 시절의 토종감귤 인자가 있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사람 좋은 그의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도 수탈에 시달리고 가난에 허덕이었던 조상들이 감귤나무를 도끼로 찍어낼 수밖에 없었던 원한의 DNA도 남아 있으리라.
  한라산을 뒤덮은 감귤향기를 맡으며 서글픈 과거사는 모두 잊었다고 한다. 오로지 앞만 바라보며 오늘도 변신을 꿈꾸고 있는 서귀포의 H씨가 자랑스럽다.


                          오뉴월 서귀포에 넘치는
                          감귤꽃 향기

                          감귤꽃 향기에는
                          수탈의 아픈 그림자가 있고
                          대학공부의 꿈도 어려 있지만
                          황금빛으로 익어갈 감귤만을 그리며
                          오늘도 즐겁게 살고 있네

                          난 그저
                          감귤꽃 향기가 좋아


[201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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