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씨앗

죽장 2014. 11. 4. 16:33

 

  묫골 육신사 앞마당 연지에도 가을이 들었다. 퇴색된 줄기는 꺾이고, 이파리는 낙엽져 더러워진 물에 고개를 쳐박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잘 여문 연실 한 톨이 물에 빠져 있었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456년. 그 무렵의 세상이 눈에 어른거린다. 남자 3대를 모조리 죽이고 여인들은 관비로 만들어 씨앗을 완전히 말리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박팽년의 둘 째 며느리는 임신한 몸이었다. 친정이 있는 대구에서 관비로 지내던 중 박팽년의 유복손자가 태어났다. 아들이면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여종의 딸과 맞바꾸어 죽음을 면한 채 17년간을 숨어 살았던 곳이 바로 이 곳 묫골이다.

 

  민들레, 박주가리, 고들빼기, 부들의 꽃씨가 낙하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도깨비방망이, 가막살이, 쇠무릅, 도꼬마리, 코스모스는 옆을 지나는 동물들의 몸에 붙어 이동한다. 찔레, 청미래, 쥐똥나무는 번식을 위하여 기꺼이 너구리, 토끼, 다람쥐의 먹이가 되고 있다. 식물들의 씨앗은 이렇게 바람이 되어 날아가고, 먹이가 되고, 배설물이 되어 번식을 하고 있는 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사 오죽하겠는가. 씨앗의 교체라는 또 하나의 방법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씨앗을 남겼다.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박팽년의 후손들이 300여 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니 성공도 이만저만한 성공이 아니다.

 

          박팽년의 유복손자 박비

          한 톨의 씨앗이 만든

          거룩한 역사의 현장 묫골

          오늘 육신사 태고정 앞 연지에서

          튼실한 연실 한 톨 보았네

 

  육신사 연지에 겨울이 찾아오면 쇠잔해진 연잎은 물론이고 꺾인 줄기조차도 어디론가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저 물가에 고개 숙이고 있는 한 알의 연실이 맞을 봄을 기다린다. 단단한 껍질을 깨고 돋아날 새로운 생명이 보고 싶다. 아, 씨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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