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예조참판에 제수하노라.’
계유정난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세조의 거듭되는 부름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지만, 받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고 쌓아두었다. 불사이군이 충신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단종을 복위하고자 했건만 뜻이 하늘에 닿지를 않았다.
의금부 마당 국문장에서 집행된 거열형. 북소리 울리자 사지를 묶은 소가 움직여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찢겨지며 붉은 피가 하늘로 솟았다. 아버지와 형제와 자식까지 끌려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하위지가 태어난 날, 마을 앞 개천에 사흘 동안이나 붉은 물이 흘러내린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 물길을 단계천이라 불렀고, 하위지는 자신의 호를 단계로 지었다.
나는 선생의 의관묘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는 사육신 하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장하면서도 만고충신과 고향이 같음이 진정 자랑스러웠다. 지금도 사육신 하위지를 생각할 때면 마치 내가 역사 속의 인물이라도 된 듯 가슴이 뜨거워진다.
말없이 흘러간 세월 500년.
선산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단계천은 말이 없고, 비봉산자락 하위지의 충절을 기리는 유허비가 쓸쓸히 맞아준다. 거미줄이 엉켜있는 무너진 흙벽돌 담장 안을 기웃거리다, 틈새로 스며드는 햇살 자락에 비치는 기와조각에 눈길이 멎었다. 긴 한숨이 저절로 목을 타고 치밀어 올라온다.
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신하의 도리요, 목숨을 걸고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했던 선비는 여전히 말이 없다. 단계와 단계천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아버지가 보고 싶다. 낙동강에 비치는 저녁노을이 곱다. 그날 단계천에 흘렀던 물빛도 오늘처럼 붉었을까. 사지가 찢겨지는 아픔은 어땠을까. 아,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는 내 귓가에 환청인가? 둥둥둥 북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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