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원고와 자료

'잡화상' 아닌 '전문점' 같은 글 써라

죽장 2013. 11. 19. 10:26

[2013.11.19, 조선일보]

'잡화상' 아닌 '전문점' 같은 글 써라

- 김명환의 글쓰기 교실 -

이것저것 나열하면 좋은 글 되기 어려워, 짧은 글은 한 테마를 골라 집중해서 써야
하나의 핵심 파고들면 글에 담기는 생각의 깊이도 깊어져, 독자에게도 뚜렷한 인상

 

학생들에게 ‘내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지어 보라고 했더니 절반 이상이 ‘낙제점’이었습니다. 대부분 자기 얼굴에 관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야말로 두서 없이 이것저것 나열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200자 원고지 5장 분량으로 쓰라는 조건을 맞추려 했는지 이목구비(耳目口鼻), 그러니까 자기 귀·눈·입·코의 특징을 각각 원고지 1장 분량씩 쓰고는 맺음말 한 장을 덧붙여 딱 5장을 만들어내더군요.

‘내 얼굴’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라고 하면 자기 얼굴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취지에 맞는 글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얼굴에 관한 생각이나 체험에서 우러나온 하나의 주제를 뽑아내, 그 주제에 집중하며 써야 좋은 글입니다. 원고지 5장 정도의 짧은 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 학생이 쓴 ‘내 얼굴’이라는 글을 읽어 봅시다.

<내 얼굴은 특별히 나은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다. 한마디로 딱 중간인 얼굴이다. 한때 내 얼굴이 개를 닮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사람의 얼굴을 개에 비교할 수 있는지 충격이었다. 아무리 봐도 내 얼굴 어디가 개를 닮았다는 것인지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 내 얼굴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남들이 나를 믿게 만드는 그런 진지함이 있다. 이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장난이나 농담을 해도 진심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덕분에 진심으로 가까운 친구를 사귈 수 있다. 나의 눈과 귀는 옳고 그름을, 또 타인과의 소통에서 거짓을 구별해 준다.나는 눈치가 빠른 것 같다. 내 얼굴은 진지함과 장난기와 아주 약간의 슬픔이 섞여있는 그런 얼굴이다. 앞으로도 세상을 담담하게 대면(對面)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인 것 같다.>

이 글은 내 얼굴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들을 이것저것 나열한 듯한 느낌입니다. 요약하면 ‘내 얼굴은 개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으며, 진지함과 장난기와 약간의 슬픔이 섞여 있으며, 내 눈과 귀는 옳고 그름을 잘 구별하며 눈치가 빠르다.’는 것인데 잘 연결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냥 죽 꿰어놓았습니다. 읽고 나서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머리에 잘 남지 않습니다. 같은 제목으로 다른 학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얼굴을 싫어했다. 별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위에 이상한 친구 하나가 있었다. 잘난 척할 외모는 전혀 아닌데도, 늘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어머, 넌 누군데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라고 말한다.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이다. 나는 그런 친구를 우습다고 여겼는데, 신기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렇게 사는 친구 얼굴이 내 눈에도 정말로 조금씩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리사 니콜스라는 흑인 여성은 “내가 나의 커피색 피부와 두툼한 입술을 사랑하게 되고 나서야, 세상도 나와 사랑에 빠진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 친구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얼굴을 늘 못 생겼다고 생각했으니 더 보기 싫은 표정이 되고 남들도 못 생겼다고 여기는 악순환에 빠진 것은 아닐까. 앞으론 생각을 바꿔 내 얼굴을 예뻐해야겠다. 그러면 정말 조금 더 예뻐질지도 모르니까. >

어떻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좀더 분명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까.자신의 얼굴에 관해서 하고 싶은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내 얼굴 사랑하기’에 관한 자신의 느낌과 체험을 테마로 잡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하나의 테마에 집중했습니다. 이 글은 ‘자기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예뻐질 수 있다’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산만한 글은 요약을 해도 길어지는데,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 글은 이처럼 짧게 요약이 됩니다.

글 쓰기를 구상하는 단계에서는 한 가지 핵심을 뽑아내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한 편의 글에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늘어놓아 산만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중해야 할 하나의 이야기를 잘 떠올리지 못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쓰기도 하고, 반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너무 여러가지 떠오르다 보니 어느 것 하나 버리기가 아까와서 글에 모두 집어 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 이렇게 쓴 글은 한 줄로 잘 꿰어지지 못한 목걸이처럼 산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핵심을 하나 뽑아내는 노력과, 하나의 주제를 정하는 과감한 결단력이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죠.‘내 얼굴’에 관해 산만하게 글을 쓴 학생도, 여러 이야기를 쓰는 대신 ‘개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내 얼굴’이나 ‘너무 진지한 내 얼굴 때문에 생긴 일’ 중의 하나를 선택해 여러 일화를 떠올려가며 살을 붙이고 파고들었다면 더 좋은 글, 재미있는 글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글을 쓸 때 왜 하나의 핵심에 집중해야 좋은 것일까요. 읽는 이에게 분명한 인상을 남기는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남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쓰는 것이므로, 이것저것 다 전달하려다, 읽은 사람 머리에 이렇다할 기억을 남기지 못하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일정한 분량 속에 여러 갈래 이야기를 다 늘어 놓다 보면 각각의 이야기는 ‘수박 겉 핥기’가 되기 쉽지만, 하나의 핵심에 집중하면 생각의 깊이도 깊어져 독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온갖 물건을 어지럽게 늘어놓고 파는 잡화상(雜貨商)같은 글보다는, 하나의 주제에 속하는 물건들을 모아놓은 전문점(專門店)같은 글을 쓰도록 하십시오.

하나의 핵심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는 마치 좋은 사진의 조건과도 닮았습니다. 프레임 안에 없는 여러 사물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얼른 알기 힘든 사진보다는, 남에게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진이 일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특정 사물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핵심이 되는 피사체에만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초점을 분명히 잡아 글 쓰는 것은 제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의 기사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입니다. 나중에 따로 상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주장을 담는 논설문에서도 하나의 핵심에 집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이것도 옳지만 저것도 일리가 있다’는 식의 ‘황희(黃喜)정승식’ 논설문이 아니라 주장을 분명히 담아야 좋은 논설문입니다.

특히 독후감이나 전시회 감상문등, 학생들이 숙제로 가장 많이 쓰는 글에서도 초점을 잡아 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효석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줄거리를 요약한 뒤 ‘참 재미있었다’는 느낌을 붙인 독후감과, 이효석 소설 속 풍경을 묘사한 아름다운 우리말에 관한 생각을 중심으로 쓴 독후감 중 어느 글이 좋은 인상을 남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