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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글러브 끼겠다, 더 멋지게

죽장 2013. 7. 16. 14:07

[2013.7.16, 조선일보]

다시 태어나도 글러브 끼겠다, 더 멋지게

 

그 시절 전남 고흥에는 권투 체육관이 없었다. 고흥농고 졸업반이던 유제두(柳濟斗·67)는 그래서 무작정 상경했다. "아따,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날릴 때 아니었소. 라디오로 시합하는 거 듣고 나도 해보고 싶어졌지라."

마포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체육관 문을 두드린 게 1965년 초였다. 한국 프로 복싱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를 주름잡던 유제두의 권투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9년 프로 전향 후 1979년 은퇴 때까지 그가 거둔 성적은 55전 50승(29KO) 2무 3패. 특히 동양 미들급 타이틀 21차례 방어는 복싱계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불린다. 1980년대 박종팔 선수(미들급)의 16차례 방어가 가장 근접한 기록이다. "제가 '장사의 고향' 고흥 출신 아닙니까. 프로레슬러 김일, 복서 백인철, 배구의 유중탁이 다 우리 고장서 났어요."


	양손에 글러브를 낀 채 카메라를 노려보는 유제두 관장의 눈빛이 매섭다.
양손에 글러브를 낀 채 카메라를 노려보는 유제두 관장의 눈빛이 매섭다. 48년간 한시도 권투를 떠난 적 없는 그는“다시 태어나도 복싱만 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2일 서울 독산동 유제두권투체육관. /김연정 객원기자
중량급이면서도 경쾌한 풋워크(발놀림)와 유연한 보디워크(몸놀림)가 유제두의 강점이었다. 완벽한 보디블로(body blow)까지 겸비해 안면 타격 없이도 상대 선수를 캔버스에 눕히는 게 장기였다.

그는 자신의 권투 인생 황금기로 1975년 6월 7일 일본 기타큐슈 고쿠라(小倉)에서 열린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세계 챔피언 와지마 고이치(輪島功一)를 7회 KO로 꺾은 순간을 꼽았다. 한·일 간에 벌어진 첫 번째 세계 타이틀 매치였다.

김기수·홍수환에 이어 역대 세 번째 세계 챔피언에 오른 그가 개선하자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 행사가 열렸다. "대단했죠. 청와대로 불려갔을 정도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고흥엔 장사가 많다지? 자네가 외교관 열 사람이 해도 못할 일을 해냈어'라며 봉황봉투를 줬는데 300만원이 들었더라고요." 100만원이면 서울에서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시절이다.

지금 그는 '관장님'이다. 1979년 은퇴와 동시에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 '한순간도 링을 떠나지 않은 권투인' '복싱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다. "IBF(국제복싱연맹) 세계 챔피언 장태일(주니어밴텀급), 동양 챔피언 박정오(웰터급), 정선용(주니어플라이급), 차남훈(〃), 장영순(〃) 등이 제자지요."

선후배 복서 중엔 은퇴 후 삶이 순탄치 못한 경우가 많다. 사업이 망하거나 사기를 당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에 비하면 유 관장은 권투계에서 보기 드문 '안정적 노년'을 보내고 있다. 서울 독산동에 자기 소유 건물(4층)이 있고, 이 건물 지하에서 권투체육관을 운영한다. 현역 때 번 대전료를 모아 1983년 건물을 올렸다.

"저축을 많이 했지요. 놀고 싶은 유혹, 여자 유혹 다 뿌리치고 연습했는데 그런(돈 쓰고 싶은) 유혹을 못 이겨서 쓰겠습니까. 아마 다른 선수들이 돈은 더 벌었을 거예요. 관리를 잘못했겠죠."


	체육관에 걸려있는 유제두 관장의 현역 선수 시절 사진.
체육관에 걸려있는 유제두 관장의 현역 선수 시절 사진.
사실 유 관장은 더 큰 부자가 될 뻔했다. 세계 타이틀 획득 후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이 "은퇴 후 체육관을 차리라"며 강남 땅 500평을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유 관장은 "강남은 호박밭인데 체육관이 되겠느냐"며 대신 연희동 땅 100평을 받아왔다. "어이구, 지금 강남에 500평이면…."

하지만 유 관장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8개월 만에 세계 타이틀을 뺏긴 일이다. 1976년 2월 17일 도쿄에서 열린 2차 방어전 상대는 전 챔피언 와지마였다. "시합 전 트레이너가 어디선가 구해온 딸기를 먹은 게 화근이었죠."

최상을 유지하던 몸 컨디션이 갑자기 난조에 빠졌다. 몽롱한 정신으로 무기력하게 흐느적대다 15회 KO로 졌다. 지금도 회자되는 이른바 '미스터리 딸기' 사건이다. '누군가 유제두의 인기를 시기해 트레이너를 매수했다' '유제두가 돈을 받고 일부러 졌다' 같은 미확인 소문들이 무성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유 관장은 말을 아꼈다. "벌써 30~40년 전 일인데 지금 얘기해서 뭐 하겠습니까. 괜히 약물 얘기하면 가뜩이나 침체된 권투를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어요. 그저 아쉬울 따름이지."

은퇴 후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는 다른 복서들에 비하면 유 관장은 건강해 보였다. 살이 좀 쪘을 뿐 건장한 체격(키 177㎝, 체중 87㎏)은 현역 시절을 연상시켰다. 그도 "눈만 빼면 다 괜찮다"고 했다. "복서는 맞을 때 눈 감으면 반격을 못 해요. 눈을 뜬 채 얻어맞는 훈련을 했는데 그 바람에 눈이 안 좋아요. 밤 운전을 못 하지요."

48년 동안 복싱만 한 것이 단조롭진 않았을까. "다른 걸 하고 싶어도 알아야 하지요. 다시 태어나도 복싱만 할 것 같아요. 그때는 더 멋있게 해야지요. 팬들이 더 좋아하도록, 와일드하게요. 허허."

인터뷰를 마친 기자가 버스를 타겠다고 하자 그는 굳이 택시를 잡아줬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그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기자를 낚아채 택시 뒷좌석에 쑤셔넣었다. 맹수가 덮친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기자의 손엔 만원짜리 두 장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