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자, 손 좀 내밀어요

죽장 2011. 12. 13. 16:06

[2011.12.13, 조선일보]

자, 손 좀 내밀어요

시인 문정희

 

"자, 손 좀 내밀어요." 성긴 눈송이가 날리는 골목을 지나다가 나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이파리 끝에 아직도 단풍물을 달고 있는 나뭇잎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눈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작은 눈송이가 이파리 위에 사뿐히 몸을 얹었다. 사람들이 못 보는 사이 시간은 이렇듯 순환을 하고 서로 간절한 이별의식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문득 온몸이 떨리었다.

구세군 자선냄비 속에서 발견된 1억1000만원 익명의 기부 소식과, 30년을 모은 돈 1억원을 선뜻 내놓은 한 은퇴 샐러리맨의 소식은 살벌하고 춥기만 한 우리의 겨울을 단숨에 녹이고도 남았다. 유난히 상처와 고통과 폭력의 언어가 난무했던 시간들, 그 가운데에도 따스한 인간의 숨소리가 눈송이처럼 순결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손 좀 내밀어요"라고 말하며 반목(反目)과 미움으로 얼룩진 시간들을 향해 화해와 사랑과 치유의 손을 내미는 것 같아 결국 인간이란 참 고귀한 존재구나 하는 자긍심마저 갖게 했다.

한 인간이 자신을 키울 수 있는 방식은 많을 것이다. 좋은 일을 위해 흔쾌히 자신의 살과 피 같은 재산을 쾌척하는 것도 그중 한 가지다. 이를 두고 언론 매체들은 1억이 넘는 큰 금액에다 초점을 두었고, 이는 자선냄비가 생긴 이래 최고액이라는 기록도 잊지 않았다. 또한 익명의 고귀함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런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뜨거운 가슴으로 실천한 선행(善行), 바로 그 자체이다. 어쩌면 1억원이나 1000원이나 저울에 달면 똑같은 무게일 수 있다. 기실 1억원을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은 그분의 선행을 바라보며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순간 돌연히 커졌을 그의 인간의 크기와 그 크기로 쟁취한 자유였다. 돈을 던진 순간, 그의 내면에 일어났을 충만한 기쁨의 불꽃이 진정 부럽기만 했다. 그 불꽃을 바라보면서 척박한 세속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따스한 감동을 선물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고액을 기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지만 실제로 몇천 원을 수줍게 모금함에 넣어 여러 사람이 스스로 작은 반딧불이 되는 것도 참 아름다운 일이다. 소음과 불만으로 가득한 습지보다 신선하고 여유로운 곳에서 선량한 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반딧불이다. 그러므로 사방에서 반딧불이 반짝이는 것은 더없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이렇듯 작은 실천들이 모여 그동안 속도와 물량 중심으로 치달으며 진정한 가치를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이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한 진정한 가치 사회로 전환시키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언젠가 한 배우가 젖은 눈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한때 실패하여 삶의 바닥을 떠돌며 노숙생활을 했다. 전신에 동상이 들 정도로 추운 영하의 밤, 맨땅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곁에 누운 노숙자가 자기가 덮고 있는 신문지 한 장을 반으로 갈라주더라는 것이다. 그가 준 신문지 반장을 덮고 온밤을 뒤적이며 그는 신문지 한 장을 가진 사람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인생은 사랑과 나눔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추운 것은 더운 심장으로 서로의 추위와 외로움을 끌어안으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메마른 계절, 빛나는 창문 하나를 열어 보여준 소중한 손위에다 부끄러운 나의 손을 슬며시 포개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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