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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가 남기고 간 '한 입 베인 사과'

죽장 2011. 10. 10. 17:27

[2011.10.10, 조선일보 아침논단]

잡스가 남기고 간 '한 입 베인 사과'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융합과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한 입 베인 사과'를 남기고 영면(永眠)의 길을 떠났다. 그가 남긴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에 버금갈 정도로 평가되고, 앞으로 역사는 세상을 '아이폰 이전(以前)과 이후'로 구분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진정한 정보화 혁명은 잡스의 '사과'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잡스에 대한 애도(哀悼) 열기로 뜨거운 것은 그의 '사과'가 단순히 IT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스의 '사과'에는 성공과 실패, 아픔과 치유의 극적(劇的) 요소가 가득 담겨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입양되고, 대학에 입학한 얼마 뒤 중퇴하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도입이다.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퇴출당하는 아픔과 연이은 실패를 극복하고 당당하고 화려하게 복귀하는 과정은 기막힌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젊은 시절 스튜어트 브랜드의 '지구백과'에서 읽은 "항상 갈구하고, 우직하라"는 금언(金言)을 잊지 않고 '창조적 천재'와 '혁신적 기업가'로 우리 앞에 우뚝 서는 클라이맥스는 숨 막히는 것이었다. 그런 잡스도 스스로 '생명의 최고 창작'이고 가장 중요한 '변화의 매개'라고 믿었던 숙명적인 죽음은 어쩔 수 없었다. 독특한 은둔의 자세를 지켜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별에도 역시 잡스다운 멋이 담겨 있다.

잡스의 '사과'에는 소비자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맛'이 필요하다는 기술혁신의 새로운 철학이 담겨 있다. 그에게 기술자, 기계, 기술만을 위한 기술은 의미가 없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라도 소비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창조성이고, 모든 소비자에게 개방되어 공유되는 콘텐츠다. 융합을 통해 모든 기술적 복잡성을 말끔하고 단순하면서도 일관된 디자인 속에 감춰버리는 것이 잡스의 탁월한 전략이었다. 극단적인 집중과 단순성, 그리고 철저한 개방·소통·공유가 애플 마니아를 열광시키는 혁신의 핵심이었다. 그런 잡스의 입장에서는 한 입 베인 사과의 무지개 색깔도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잡스의 '사과'에 담긴 융합과 혁신의 꿈은 단순히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같은 기술혁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무선 인터넷과 개방형 콘텐츠가 우리의 집단지성(集團知性)을 획기적으로 도약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집단지성이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다. 집단으로 사냥을 하는 사자나 상당한 수준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미와 꿀벌에서도 집단지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도로 복잡한 언어를 이용해서 집단지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소통·분업·교역을 기반으로 하는 화려한 문명을 이룩했다. 인류의 집단지성은 문자와 인쇄술을 통해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제 20세기의 정보화 기술을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도록 만들어준 잡스의 '사과'가 인류의 집단지성을 궁극의 지위로 끌어올려주고 있다.

극단적인 분화(分化)와 전문화로 사회와의 공감대를 잃어가고 있던 인문학과 예술이 잡스의 '사과'를 통해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인문학과 음악과 미술의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새로운 형식의 '디지털 인문학'과 '디지털 아트'가 꿈틀거리며 솟아나고 있다. 인종과 국경의 벽도 무너지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새로운 음악시장이 등장했고, K-팝이 세계적 광풍(狂風)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도 흔들리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외면하던 중동의 권위적 정권들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앞세운 재스민혁명에 힘없이 무너져버렸다. 어렵게 쟁취한 우리의 민주주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잡스의 '사과'에 의한 변화가 앞으로 우리의 삶과 문명을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융합·참여·소통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융합과 혁신에 매달릴 일은 아니다. 무엇이나 섞는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혁신이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다. 진정한 융합과 혁신은 인문학과 과학과 기술과 예술이 나름대로의 확고한 정체성과 전통을 지켜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칫 과도한 융합과 혁신은 아무도 원치 않는 획일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제 잡스가 남기고 간 '사과'를 어떻게 활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는 온전하게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