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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의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죽장 2011. 10. 17. 12:54

[2011.10.17, 조선일보 아침논단]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의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학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곳에서 고생하는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격려연설을 했다. "광부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異國)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설움에 북받쳐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광경에 목이 멘 박 대통령은 결국 눈물로 연설을 대신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국가지도자 운(運)이 아주 좋았던 나라다. 파독(派獨)광부와 간호사로 상징되는 우리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는 행운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나라는 필리핀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은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의 '나라 세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6·25전쟁 때 적화(赤化)되었을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들 두 위대한 대통령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대통령들도 나름 그 시대에 잘 맞는 지도자들이었다. 만약 강력한 반공(反共)이 필요했던 시대에 김대중 대통령이, 반대로 민주화 시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의 지도자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처럼 지도자는 시대정신(時代精神)과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명박·노무현 대통령은 서로 시대를 바꿔 대통령이 됐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것은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를 겪으며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비유한다면 노무현 정부 시절의 세계경제 환경은 따뜻한 간빙기(間氷期)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만약 그때 이명박 대통령이 '747공약(7% 경제성장, 10년 내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을 추진했다면 지금쯤 우리의 1인당 GDP는 3만달러 수준이 됐을 것이다. 세계경제는 2008년에 간빙기가 끝나면서 빙하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의 1인당 GDP가 3만달러였다면 이 빙하기에 대처하기가 더 수월했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2만달러 수준이다. 빙하기의 경제정책은 간빙기 때와는 달라야 한다. 빙하기에는 노무현 대통령 스타일의 분배·복지 정책이 '747공약'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미국 마운트 시나이(Mount Sinai) 의대 연구원인 섀런 모알렘(Moalem) 박사는 '아파야 산다(Survival of the Sickest)'라는 저서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 당뇨병이 현재의 간빙기 기후 환경에서는 건강의 적(敵)이지만 과거 빙하기에는 생존을 위한 진화적 해결책이었다고 설명한다. 물의 염분 농도가 높을수록 빙점이 낮아지듯 혈당치가 높으면 추위에 몸이 잘 얼지 않아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분배·복지 정책은 당뇨병을 닮았다. 당뇨병이 서서히 신체기관을 망가뜨리듯 과도한 분배·복지 정책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활력을 떨어뜨려 서서히 시스템을 파괴한다. 우파(右派) 시장주의자들이 한나라당 중도·소장파의 '좌(左)클릭' 복지 정책을 반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빙하기에 저소득층을 끌어안고 함께 가려면 혈당치를 높이듯 분배와 복지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은 1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완료했다. 빙하기를 견딜 '식량'을 늘릴 수 있는 낭보다. 이 대통령은 우리측 비준도 조속히 완료토록 리더십을 발휘해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 이어 박 대통령이 '번영의 터전'을 닦았던 심정으로 자신의 가시적 업적보다는 차기 대통령이 빙하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다음 세 가지의 인기 없는 개혁에 나서야 한다.

첫째,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 15일 시작된 '서울을 점령하라(Occupy 서울)' 시위가 미국에서처럼 '청년백수 시위'로 확대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둘째, 신규 토건(土建)사업을 중단해 사회안전망 확충에 들어갈 복지재원을 미리 마련해둬야 한다. 셋째, 공무원 연금처럼 덜 내고 더 받는 현행의 공적연금 구조를 바로잡아 빙하기의 재정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 천안함 사태 한 달여 뒤 현충사를 찾아 참배하며 이순신 장군의 "죽으려고 나아가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가르침을 되새겼다고 한다. 이제 다시 그 정신을 되새기며 힘든 개혁에 매진해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