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0.2.10 윤용인 아저씨 가라사대]
일요일 우리집 평화는 찜질방 나오면서 깨졌다
[전략]외출한다면 연지곤지 찍고 머리 드라이하고 이 옷 저 옷 한 번씩 다 입어본 후, 음식 쓰레기까지 챙겨 나오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운전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다신 너랑 어디 안 간다'부터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는 독설까지 상습적 지각자에 대한 남자의 푸념은 끝도 없다.
애들 한두 명 생기면 외식의 패턴도 바뀐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요리에 와인 한 잔은 역시 신혼 때의 풍경이다. 아이들이란 생명체는 조용한 곳에서 더 튀어 보인다. 녀석들은 값비싼 장식의 식당에서 부모를 더 긴장시킨다. 걸어 다니는 사고뭉치 덕분에 만만한 게 중국집이다. 깨지지 않는 알록달록 플라스틱 컵에 자장면에 탕수육, 니들에게 참으로 고맙다.
고마운 건 그것만이 아니다. 찜질방은 또 얼마나 위대한 탄생인가. 좁아터진 집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일요일을 보내지 않게 된 것도 다 찜질방 덕분이다. 준비운동 긴 아내도 찜질방 갈 때는 오분 대기조로 뛰어나온다. 산발한 머리에 야구모자 하나 눌러쓰고 생얼(민얼굴)에 추리닝차림으로 즉각 출동이다. 집에서는 뒹굴거린다고 온갖 눈총을 다 주는 아내도 찜질방에서는 정좌로 앉아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난리다. 배고프면 미역국 하나 시켜먹고 만화책 보다 TV 보다 애들은 PC방에서 아내는 찜질방에서 각각 방목되고 있으니 대한 찜질방 만세다. 젊은 애들 끼고 안고 있는 것을 보며 자극받아서인지, 찜질방에서는 유난히 금실 좋은 척 착착 붙어앉는 마누라도 귀엽다. 여봐라, 나도 이런 서방님 있다고 시위라도 하는 양 그 무거운 통다리를 척 하고 허벅지에 올려놓는 늠름함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이집저집 모두 비슷한 풍경이니 우리라고 못할 건 또 뭐 있나.
그러나 찜질을 마치고 남탕 여탕으로 찢어지면서 해피의 시대는 가고 비극의 시간이 도래한다. 입구에서 여덟 시 반에 만나,라고 다짐을 하고 아들놈 손잡고 탕으로 들어가 샤워로 마무리하고 입구로 나오면, 꼭 있다, 입이 한 사발은 나온 사내들이. 제 버릇 찜질방에 못 놔두고는 또다시 지연작전 펼치는 남자의 여자들이.
여덟 시 반이 사십 분이 되고, 사십오 분이 되면 혈압은 폭발 직전이고 코에서는 쉭쉭 된소리가 나온다. 가서 엄마 좀 불러오라고 일곱 살 아들놈을 여탕에 밀어 넣으면, 콩알만 한 게 벌써 내외를 한다고 죽어도 못 들어간다며 버틴다. 안내방송 해달라고 부탁할 찰나, 머리 탈탈 털면서 나타나는 원수 같은 저 여인. 사람 많은 데서 화도 못 내겠고,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부터 남자와 여자의 방백은 시작된다. '집에 가서 보자, 으르렁' '몇 분 기다린 것 가지고 쫀쫀하게 남자가 씩씩거리긴.' 여자는 찜질방 다녀오면 개운하고 남자는 개운해하는 지각대장을 보면서 머리의 찜질이 시작되는, 당신네 집 일요일 풍경이다.
[주] 아침 신문을 읽고 재미있는 표현이 많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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