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원고와 자료

연필도 못깎는 요즘 아이들

죽장 2009. 7. 2. 08:06
 연필도 못깎는 우리 아이들… '손재주 코리안' DNA가 죽어간다


- 컴퓨터·휴대폰에만 일찌감치 빼앗긴 손, 기능올림픽 금(金) 급감 -

- 손 스케치 서툰 미대생 손끝 무뎌진 치대생… 국가경쟁력 잃고 있다 -


  경기도 분당에 사는 은하(가명·백현초 4년)의 6월 24일 하루 동안 일과를 관찰한 결과, 오전 7시에 일어나 밤 11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깨어 있는 16시간 중 은하의 손이 공부와 컴퓨터, 휴대폰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총 9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학원에서 피아노(1시간), 체육시간 피구(40분)를 제외하고 은하가 뭔가를 만드는 데 손을 쓴 시간은 없었다. 은하의 일상은 다른 날도 비슷하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현호(가명·수색초 3년)도 비슷하다. 현호는 이날 학교에서 6시간을 보냈고, 5시간 동안 학원 세 곳을 다녔다. 밤 10시에 컴퓨터에 앉아 타자 연습을 한 뒤 컴퓨터로 숙제를 해 프린트했다. 현호의 컴퓨터 타수는 나날이 늘고 있지만 아직 젓가락질은 서투르다.

  '세계 최고의 손재주'를 가졌다는 한국의 손이 공부와 컴퓨터에 결박당했다.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빨리 입력하는 '엄지족'은 급증했지만 젓가락질이 서툴고 손으로 연필도 못 깎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 손 쓰는 일이 어색한 아이들

  본지가 서울지역 초등학생 101명(서울 수색초 48명·서울 신구초 53명)과 같은 연령의 핀란드 초등학생 46명을 대상으로 해 본 설문결과는 더 충격적이다. '장난감이나 물건을 고치기 위해 망치로 못을 박아봤는가'라는 질문에 핀란드 학생 100%가 '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반면 한국은 수색초 학생 19%, 신구초 학생 11%만 '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한 교사는 "칼질이 위험하다며 엄마들이 미리 색도화지를 잘라 교재를 준비해 놓고 아이들은 붙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어린이 공예교육가 이모(41)씨는 "얼마 전 초등학교 교육에 문구용 칼과 송곳을 준비해 가려 했지만 학교측이 말렸다"며 "칼은 가위, 송곳은 펀치 기계로 대체해달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유치원에서 톱과 전동공구까지 체험하는 북유럽·일본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더군요." 계원디자인예술대 백종원 교수는 "실습을 할 때, 아이들이 문구용 칼에 손을 베기보다는 종이에 베는 경우가 더 많다"며 "안전하게 도구를 쓰는 것 자체가 배움의 과정인데 요즘은 이 과정이 생략된다"고 지적했다. 학부모 황인정(37)씨는 "정서상 뜨개질 같은 게 좋다는 건 알지만 그런 일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세계인이 감탄했다는 한국인의 '능숙한 젓가락질' 신화도 흔들리고 있다. 15년간 '젓가락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병숙 경기대 직업학과 교수는 "초등학생 중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는 애들이 10%도 채 안 된다"고 했다. 수색초 정현주(48) 교사는 "20여년 전에는 연필을 바르게 못 쥐는 아이가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제대로 잡는 아이가 3분의 1도 안 된다"고 했다. "학급마다 자동연필깎이가 비치돼 있어 이젠 연필을 손으로 깎을 수 있는 아이도 거의 없어요."


손끝 무뎌진 의료·디자인 현장

  지난 2005년 핀란드에서 열린 38회 기능올림픽에서 한국이 딴 금메달은 3개. 1978년 22개를 비롯해 70~80년대에 금메달 15개는 너끈히 땄던 데 비하면 충격적인 성적이었다.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일본·독일·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많은 수의 메달을 딸 뿐 아니라 최근 들어 참가인원이 더욱 늘어나 활기를 띠는 기능올림픽의 강국으로 남아 있다.

  의료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동대 치위생학과 유자혜 교수는 "요즘 들어 아무리 연습해도 수기(手技·손기술)가 안 되는 학생들이 부쩍 늘어 그 학생들의 성적을 일일이 봤더니 학과 성적은 뛰어났다"며 "어렸을 때 손을 사용해 노는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영준 연세대 세브란스 치대 외래교수 역시 "발표 수업에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던 학생들이 실습 시간이 되면 '발로 하나' 싶을 정도로 손재주가 떨어진다"며 "치과의사에겐 손이 '무기'인데 평균적으로 요즘 치대생들의 손기술이 예전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걱정했다. 의료기기의 첨단화로 손의 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원자력병원 정형외과 이수용 박사는 "전에는 수술할 때 오스테오톰(정과 같은 수술도구)으로 직접 뼈를 깼지만, 요즘은 드릴을 사용하기 때문에 미세하게 손의 숙련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손맛'이 곧 개성이자 경쟁력인 디자인·패션업계에서도 '야무진 손끝'이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휴대폰·컴퓨터 등 IT제품의 경우, 형태는 훌륭하지만 접합 같은 마감(마무리) 처리가 깔끔하지 않은 게 문제로 지적된다. 김철호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원장은 "어려서부터 재료와 도구를 만지며 커온 유럽이나 일본 디자이너들의 섬세함을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마무리가 약하다"고 설명했다.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김현 디자인파크 대표는 "신입 디자이너 중엔 손으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제대로 못하는 친구도 많다"고 걱정했다.


손 쓰는 기술, 경쟁력이다

  컴퓨터가 있는데 굳이 '손'을 혹사할 필요가 있을까. 정국현 삼성디자인경영센터 고문은 "요즘은 장인정신과 감성이 고부가가치를 이끌어내는 시대"라며 "손을 쓰는 우리 전통문화를 산업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백종원 교수는 '신일본양식(新日本樣式·Japanesque Modern)' 캠페인을 모범 사례로 든다. 일본경제산업성 주도로 2006년 시작된 이 국가브랜드 전략은 일본의 전통 손기술과 미학을 산업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필기(筆記) 정서'를 알리는 상징으로 미쓰비시의 연필 '우니(uni)'를 선정했다. 세계인들에게 '일본=손글씨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백 교수의 걱정은 이렇다. "손재주에도 용불용설(用不用說)이 적용됩니다. 유전적인 우수함만 믿고 손을 이렇게 놔둔다면 우리의 손재주 DNA도 녹슬지 모릅니다."

[2009.7.2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