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구활의 "우울한 귀향 "

죽장 2007. 10. 9. 15:57

                          
   이제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 젊음을 바친 직장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고 있는 미워진 자신까지도 버려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거듭해 오던 이별 연습도 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멋진 귀향, 화려한 이 한 마디를 앞세우고 나는 돌아가야 한다. 잃어버린 고향이 그 어디멘지 몰라도 기어이 나는 돌아가고야 말리라. 가서 집을 지으리라.

 

  집 뒤엔 얕은 언덕과 구릉이 먼 산으로 연해져 있고 먼 산은 걸어서 반 마장 정도 거리에 있었으면. 그 곳에 살면서 저녁 무렵이면 언덕에 올라 서산으로 지는 해를 배웅하며 붉게 물드는 황혼을 보리라. 그 장려한 낙조 속에서 내 저리고 아팠던 청춘과 생애를 다시 보리라.

 

  집 앞에는 실개천 보다 좀 더 넓은 거랑(川)이 크고 작은 조약돌로 모자이크되어 있고 그 조약돌 사이로 맑은, 정말로 맑은 시냇물이 일년 사철 흘러가는 곳. 투망이나 반두를 들고서도 걸어서 한번쯤 쉬고 닿을 수 있는 거리. 낡은 자전거라도 있으면 단숨에 이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살리라. 정말 그러리라.


  강변 여기저기엔 키 큰 미루나무. 동네 입구에는 폭넓은 정자나무 한 그루가 노인들과 조무래기들을 불러 모으고. 아, 우리 집 입구에 들어서면 감나무 숲 속에 갇힌 듯한 토담집 하나가 그림처럼 아름다워라.
서쪽 담벼락에 붙어선 키 큰 참가죽나무 한 그루는 해마다 햇순을 피워내, 그래서 봄마다 상큼한 입맛을 돋워 주고. 동쪽 우물가에는 갓 튀겨낸 박산을 뒤집어쓴 듯한 조팝나무와 박태기나무가 친한 이웃처럼 이마를 마주 대고 서 있는 우리 집. 그리워 그리워하면서도 꿈에서만 찾아가는 아름다운 집.

 

  찌그러진 두레박으로 길어낸 우물물은 토란 밭으로 비워지고 녹색 우산을 받쳐 든 수줍은 새악시 같은 토란들의 미소가 모여져 아침마다 수정 같은 물방울이 돌 돌 도올 굴러 떨어지는 곳. 사립문에서 처마 밑 섬돌까지는 열 발자국 아니 스무 발자국쯤. 비 오는 날을 위하여 동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맷돌과 풀매 조각으로 징검다리 식 디딤돌을 만들어야지.

 

  집 경계인 흙돌담 벽면에는 그 동안 산천을 돌아다니며 탐석했던 돌중에서 가려 뽑고 남은, 선에 들지 못한 형형색색의 돌들로 멋을 부려야지. 남은 땅은 채마밭과 꽃밭을 반반씩 일궈야지. 그래서 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상추 쑥갓 오이 실파 아욱 부추 가지 등 온갖 푸성귀를 키우고 꽃밭은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 접시꽃 나팔꽃 등을 적절하게 어우러고 배열한 후 대추나무 아가배나무 꽃사과나무 등 유실수도 심고. 그래, 오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뽕나무 한 그루쯤 심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어느 빛 밝은 날,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문간을 들어서면서 "이거 고향이네. 정말 고향이야."하고 소리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 집은 고향에서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풀꽃들과 나무들을 가득 심어야지.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집. 서쪽 감나무 밑에는 낱알과 굼벵이 지렁이 따위를 쪼다가 지친 닭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닭장을 짓고 횃대도 높이 올려야지. 닭들은 동트기 전부터 부움하게 밝기 시작하는 동녘 하늘만 보고도 새벽을 알리는 꼬끼요를 목청 높여 노래할 수 있도록. 

 

  동창이 있는 서재에서 밤늦게 까지 글을 쓰다가 새벽을 알리는 계명성을 꿈속 같이 아련하게 들을 수 있도록. 간혹 찾아오는 친구들과 늦은 술을 들다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도 꼬끼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찬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들이 킨 후 아직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신새벽의 숲길을 취한 걸음으로 걸을 수 있도록. 아 그 축복의 나라 속에 있는 작은 나의 집.

 

  늦은 아침상을 들고 있는데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되어버린 쌍둥이 감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까치들이 집 주위를 선회하며 까 까까 까악 하고 신나게 떠들어  대는 곳. 이미 반백으로 늙어버린 아내가 ꡒ여보, 아이들에게서 무슨 좋은 기별이 올려나 봐요ꡓ하고 아직 우체부의 붉은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소식을 까치를 통해 미리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그 궁금증 때문에 아침 식욕을 잃어버리는 나의 집.

 

  나는 정말 그런 곳에서 살리라. 여름밤이면 처마 밑에 매달아 둔 멍석을 깔고 마당 어귀 여기저기에 엉겅퀴와 쑥대 등을 말린 건초들에 모깃불을 지피고 아스라이 치어다 보이는 은하수 너머에 마음까지 올려 보낼 수 있는 곳. 짧은 생애동안 별의 시만 쓰다 간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다가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통해 아름다운 목동의 이야기를 들려 준 알퐁스 도테 선생도 자주 떠올릴 수 있도록. 그것도 지겨우면 동리 주막에서 가져 온 모가지에 줄을 묶어 넣어둔 우물 속의 막걸리를 꺼내 풋고추와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조촐한 술판이라도 벌여야지. 겨울이면 짚동 사이에 얼지 않게 갈무리해 둔 홍시를 꺼내 먹거나 짚 봉태기 속에 낳아 둔 씨암탉의 달걀 몇 개를 무명실로 감아 질화로의 불씨 옆에 파묻어 두었다가 꺼내 먹는 맛.

 

  오후부터 내린 눈이 지붕 위에 한 자쯤 쌓이면 혹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서까래들이 우지끈 소리를 낼까 보아 긴 대나무 장대로 쌓인 눈을 털어 내는 야간 노동의 즐거움. 아, 꿈속에서만 천 날 만 날 찾아가는 그리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직 이 도시에 머물러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도시의 회색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에게 '왜 머물고 있는가?'고 질타하고 '어서 달려가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맺고 있는 인연의 끈들을 풀거나 끊기에는 시간과 여건이 예사롭지 않아 '그래 알았어.'하고 약간의 말미를 줄 것을 간청하곤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물거리고만 있다가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왈칵 겁이 날 때도 있다. 나의 몸과 기억들이 더 이상 쇠잔해지기 전에 피곤한 육신이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할 텐데.

   고향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만 답답하고 기억 속의 그곳은 아득할 뿐이다. 그래서 꿈속에서 자주 행하는 나의 귀향은 우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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