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수필 가작당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마음이 심란해 차일피일 미루던 차 지인의 권유로 길을 나섰다. 들판의 초목도 시들하고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하다. 아버지의 간병과 상으로 두어 달 남짓 일상을 비웠을 뿐인데 처음 세상에 나오는 아이처럼 조심스럽다.
‘소쇄원’에 이르렀다. 한국정원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곳답지 않게 스산했다. 입구의 청죽은 바람에 제 몸 부대끼며 소소한 죽파(竹波)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려한 대나무 사이를 나는 새들의 지저귐이 정겨워 일행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소리를 내는가. 나는 부러 성큼 성큼 발을 떼었다.
‘소쇄원’은 산천을 자연스럽게 울안으로 들여 놓은 별서정원이다. 인위적 손길을 가급적 피하고 자연을 담쑥 보듬어 정자를 지은 모양새가 제법 후덕지다. 그 중 으뜸은 심산유곡에서나 볼 수 있는 계곡이지 싶다. 담장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물이 암반을 다섯 굽이 휘돌아 폭포가 되는 오곡담. 비 갠 여름날에 오색의 무지개라도 서린다면 가히 절경이지 않을까.
널찍한 바위와 괴석을 멋대로 두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만들었다는 담장은 수묵의 ‘소쇄원’에 담홍빛 수를 놓은 듯 예스러웠다. 만약 계곡을 훼손하고 집을 지었다면 이처럼 운치 있지는 않으리. 뒷산을 돌아 돌아 흘러온 녹수가 담장 아래서 놀던 가을빛과 어우러졌다. 저 빛을 벗 삼아, 달 밝은 밤에 청아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벗 삼아 양 처사는 세상의 시름을 달랬을 터, 내 아버지는 무엇으로 시름을 달랬을까.
나는 제월당 대청마루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새로운 보금자리라도 꾸미는지 새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나대며 다정히 지저귄다. 어머니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성질 급한 어머니를 조곤조곤 다독이며 살림을 늘려가느라 새처럼 분주하던 아버지. 먼저 간 어머니를 못 잊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새로 이사한 집에서 아버지는 홀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휑하게 비어 을씨년스럽던 아버지의 집에도 새들은 날아와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은 머물지 않고 소리를 남기지 않으나 여운이 길다 했다. 사람이 살다 가는 것 또한 저 바람 같지 않을까. 흔적은 사라져도 기억하는 한 존재하는 것처럼. 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한기에 마른 비늘이 솟는다. 바람이 머물지 않듯, 순리에 따라 계절이 오고 가듯, 사람도 떠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 내 곁을 떠났을 뿐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한기가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선비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이곳도 이제는 주인을 잃고 객들의 발자국만 어지럽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도 불귀의 객이 되었고 미천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도 하늘의 뜻을 따라 갔다.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유한하기에 사라져 가는 것 또한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 아닌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던 한기가 서녘을 향하던 빛의 그물에 걸려 팔딱인다. 느긋하게 누워 짧은 오수나 즐길까. 한 줌의 햇살이 내 시린 등짝을 덮는 햇솜이라면 그 옛날 양 처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이곳에서 단잠을 청해 보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잠을 통하여 내 곤한 심신을 잠깐이라도 쉬어 주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완만하게 구비치는 앞산의 능선이 다가온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 구슬을 꿰듯 사그락 사그락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소박한 대기가 한결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런 곳에 산다면 부귀영화도 한낱 구르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리. 이곳에 머물러 인간사 생사를 초탈하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아볼까 하는 낭만적 생각 속에 문득 면앙정가가 떠올랐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어 둘러 두고 보리라.”
비록 초가삼간일지언정 들일 데 없는 강산을 둘러 두고 보리라는 송순의 면면함이 오늘따라 가슴 시리다. 한 생 사는데 뭐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여 영육을 들볶아댔는지.
건강은 타고 났다며 한사코 병원 가기를 거부했던 아버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자신의 온 몸이 암 덩어리란 것을 알았다. 김씨 집안의 장손이기에 기울어 버린 가계를 일으키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던 아버지. 나는 그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초가삼간에 달 한 칸 청풍 한 칸 들이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며 나 역시 사는 일에 악착 떨기에만 급급하였다. 최소한 정기검진이라도 받게 하는 여유를 부려야 했다. 숨 가쁘게 죽음을 향해 치닫는 아버지 곁에서 무릎을 치기 전에 말이다.
허리가 시큰시큰해져 온다. 다리를 풀고 일어서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어찌 살아야 하는가. 함께 떠난 길동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회한에 빠져 있는 나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하나의 얼굴을 대하니 새삼스레 정이 겨웁다. 저들이 있지 않은가. 저들과 어울려 무릎을 치는 일을 줄여가면 되지 않겠는가.
늦은 가을 햇살이 제월당 용마루를 지나 48영도를 천천히 휘감아 돈다. ‘소쇄원’은 붉은 빛에 싸여 4백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듯 생기가 충전했다. 아버지의 빈 집에 들려 유품을 정리해야겠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마음이 심란해 차일피일 미루던 차 지인의 권유로 길을 나섰다. 들판의 초목도 시들하고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하다. 아버지의 간병과 상으로 두어 달 남짓 일상을 비웠을 뿐인데 처음 세상에 나오는 아이처럼 조심스럽다.
‘소쇄원’에 이르렀다. 한국정원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곳답지 않게 스산했다. 입구의 청죽은 바람에 제 몸 부대끼며 소소한 죽파(竹波)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려한 대나무 사이를 나는 새들의 지저귐이 정겨워 일행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소리를 내는가. 나는 부러 성큼 성큼 발을 떼었다.
‘소쇄원’은 산천을 자연스럽게 울안으로 들여 놓은 별서정원이다. 인위적 손길을 가급적 피하고 자연을 담쑥 보듬어 정자를 지은 모양새가 제법 후덕지다. 그 중 으뜸은 심산유곡에서나 볼 수 있는 계곡이지 싶다. 담장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물이 암반을 다섯 굽이 휘돌아 폭포가 되는 오곡담. 비 갠 여름날에 오색의 무지개라도 서린다면 가히 절경이지 않을까.
널찍한 바위와 괴석을 멋대로 두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만들었다는 담장은 수묵의 ‘소쇄원’에 담홍빛 수를 놓은 듯 예스러웠다. 만약 계곡을 훼손하고 집을 지었다면 이처럼 운치 있지는 않으리. 뒷산을 돌아 돌아 흘러온 녹수가 담장 아래서 놀던 가을빛과 어우러졌다. 저 빛을 벗 삼아, 달 밝은 밤에 청아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벗 삼아 양 처사는 세상의 시름을 달랬을 터, 내 아버지는 무엇으로 시름을 달랬을까.
나는 제월당 대청마루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새로운 보금자리라도 꾸미는지 새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나대며 다정히 지저귄다. 어머니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성질 급한 어머니를 조곤조곤 다독이며 살림을 늘려가느라 새처럼 분주하던 아버지. 먼저 간 어머니를 못 잊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새로 이사한 집에서 아버지는 홀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휑하게 비어 을씨년스럽던 아버지의 집에도 새들은 날아와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은 머물지 않고 소리를 남기지 않으나 여운이 길다 했다. 사람이 살다 가는 것 또한 저 바람 같지 않을까. 흔적은 사라져도 기억하는 한 존재하는 것처럼. 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한기에 마른 비늘이 솟는다. 바람이 머물지 않듯, 순리에 따라 계절이 오고 가듯, 사람도 떠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 내 곁을 떠났을 뿐이라고 자위해 보지만 한기가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선비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이곳도 이제는 주인을 잃고 객들의 발자국만 어지럽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도 불귀의 객이 되었고 미천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도 하늘의 뜻을 따라 갔다.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유한하기에 사라져 가는 것 또한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 아닌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던 한기가 서녘을 향하던 빛의 그물에 걸려 팔딱인다. 느긋하게 누워 짧은 오수나 즐길까. 한 줌의 햇살이 내 시린 등짝을 덮는 햇솜이라면 그 옛날 양 처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이곳에서 단잠을 청해 보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잠을 통하여 내 곤한 심신을 잠깐이라도 쉬어 주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완만하게 구비치는 앞산의 능선이 다가온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 구슬을 꿰듯 사그락 사그락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소박한 대기가 한결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런 곳에 산다면 부귀영화도 한낱 구르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리. 이곳에 머물러 인간사 생사를 초탈하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아볼까 하는 낭만적 생각 속에 문득 면앙정가가 떠올랐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어 둘러 두고 보리라.”
비록 초가삼간일지언정 들일 데 없는 강산을 둘러 두고 보리라는 송순의 면면함이 오늘따라 가슴 시리다. 한 생 사는데 뭐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여 영육을 들볶아댔는지.
건강은 타고 났다며 한사코 병원 가기를 거부했던 아버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자신의 온 몸이 암 덩어리란 것을 알았다. 김씨 집안의 장손이기에 기울어 버린 가계를 일으키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던 아버지. 나는 그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초가삼간에 달 한 칸 청풍 한 칸 들이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며 나 역시 사는 일에 악착 떨기에만 급급하였다. 최소한 정기검진이라도 받게 하는 여유를 부려야 했다. 숨 가쁘게 죽음을 향해 치닫는 아버지 곁에서 무릎을 치기 전에 말이다.
허리가 시큰시큰해져 온다. 다리를 풀고 일어서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어찌 살아야 하는가. 함께 떠난 길동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회한에 빠져 있는 나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하나의 얼굴을 대하니 새삼스레 정이 겨웁다. 저들이 있지 않은가. 저들과 어울려 무릎을 치는 일을 줄여가면 되지 않겠는가.
늦은 가을 햇살이 제월당 용마루를 지나 48영도를 천천히 휘감아 돈다. ‘소쇄원’은 붉은 빛에 싸여 4백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듯 생기가 충전했다. 아버지의 빈 집에 들려 유품을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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