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죽장 2006. 11. 24. 09:04

[영남수필문학회 홈피에서 퍼온 작품입니다]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수필가 견  일  영

어렸을 때 하루는 아주 길었다. 내가 10살 때, 소 먹이러 나가면 오후 한나절이 왜 그리 길던지. 강둑에다 소를 놓아두고 목욕이라도 하려면 방천지기 영감의 거친 욕에 감히 둑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들 옆 낮은 산에다 방목을 하고 꼴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산지기의 고함소리에 얼씬도 못했다. 오직 소 먹일 곳은 논두렁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논두렁에다 소를 몰아넣고 소고삐를 꼭 쥐고 있으면 정말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 같아 그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한여름의 햇살은 빡빡 깎은 맨머리 위를 사정없이 내려 쬐고, 소고삐만 쥐고 두렁 가운데 서 있는 나는 유황 지옥에 들어 있는 기분이다. 좌우 둑의 풀을 뜯어 먹던 소가 잠간 방심하고 있는 사이 논에 있는 벼를 한 입 냉큼 베어 먹으면 나는 화들짝 놀라 쥐고 있던 고삐로 소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소는 겁먹은 눈으로 어린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휘두르는 고삐 매를 피한다.

 

해는 중천에서 좀처럼 서쪽으로 기울 생각을 안 하고 시간은 아예 그늘 밑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새까맣게 탄 얼굴로 논둑에 서 있는 나는 목이 타고 배가 고파도 어쩔 수 없이 소배가 양쪽으로 불룩해 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어린 시절의 꿈같은 세월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지난날의 그 긴 시간들이 한 컷의 필름으로만 남았다. 10대의 시간은 10킬로로 달리고, 60대의 시간은 60킬로로 달린다고 한다. 지금은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고 그 시간을 헤아려 볼 여가도 없이 금세 멀리 달아나버린다. 추억도 어릴 때보다 빨리 희미해지고 감흥도 이내 퇴색해 버린다. 세월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아니고 힘껏 쏘아올린 화살이다.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겨진 솔로몬의 말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 청춘과 사랑만은 내 가슴 속에서 영원히 머물 줄 알았는데 그마저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다. 생사를 초월한 우주인도 멀어져가는 지구를 보면 두려운 생각이 들 것이다. 헤어지고, 멀어지고, 잊혀지는데도 어찌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깊은 철학의 경지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작은 것에도 그 실체를 끌어안고 온 정신을 쏟아 집착하고 있으니 고뇌가 떠날 날이 있겠는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들판이나 산들의 풍경은 천천히 뒤로 물러간다. 더 멀리 보고 더 높이 보면 더 천천히 지나가서 시간에 대한 관념이 훨씬 여유 있게 될 것 같다.

 

내 마음은 언제나 허해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언제나 불만으로 꽉 찬 내 가슴은 어둡고 답답하다. 그래서 나는 신에게 한없이 많은 것을 요구한다. 내가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내가 남보다 적게 가졌다고 신을 원망한다.

그렇게 지루하던 시간들도 세월이 흐르니 그 느낌이 달라진다. 젊은 시절, 최전방 참호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 때 그렇게 길게 느끼던 시간들이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시절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을 때 그 부끄러운 시간들이 지금은 예쁜 앨범이 되어 서가에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던 그 초조한 시간이 영롱한 무지개가 되어 가끔 내 마음에 비가 올 땐 나타나곤 한다.

 

나는 부질없이 지나간 세월을 확인해 보고 싶어 선산읍으로 들어가는 감천강 다리로 갔다. “너를 세 살 들던 길로 데려다 키웠다.”고 할머니로부터 수없이 들은 이 기억을 더듬어 다리의 준공 연도를 확인해 보았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나무다리 옆에 새 다리를 놓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때가 언제인가? 다리 난간에는 내가 네 살 때의 연도가 새겨져 있다. 할머니를 따라 구미에 계시는 부모님을 만나러 자주 갔었는데 너무 어려 새 다리를 놓는 모습 그것 하나밖에는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간신히 매달린 소중한 이 시간의 기록마저 얼마나 더 오래 내 가슴에 머물고 있겠는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길게만 느끼던 시간들이 다 어디로 떠나가고 퇴색된 시간의 잔해로 남아 있는가. 철인(哲人)은 집착을 버리면 고뇌가 해소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 집착도 내가 없어지는 날 자연스레 소멸되고, 고뇌도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말 것이다. 또 하루가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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