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전북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항아리 / 방민실
웅덩이 안을 들여다보니 나뭇가지 끝을 담고 활동사진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여주고 있다. 열 서너 살까지 그랬듯이 그 안에 발을 담그고 실컷 꾸정거리다 물을 가라앉혀 웃물에 물수제비뜨듯 발에 묻은 모래알을 씻어내고 싶다. 그냥 스쳐가기가 망설여진다. 들여다볼수록 우묵하니 폭 파인 모양이 항아리 속 같다.
그즈음 우리 집에는 하릴없이 입을 벌리고 빗물이나 받아마시던 큰 독이 있었다. 웅덩이 같은 독이었다. 주둥이에 금이 간 그 큰 항아리를 자주 들여다보았었다. 항아리를 들여다 볼 때도 내 배경으로 구름이 흘렀었다.
나를 보다가 내 배경을 바라보다가 그도 시시해지면 손으로 휘휘저어 항아리 안이 소용돌이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더 이상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배경이고 뭐고 얼굴까지 일그러져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니 항아리속이 우렁잇속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뱅뱅 돌아가다 급작스레 항아리 밑이 열리며 딴 세상으로 연결된 통로가 나타날 것도 같았다. 물길을 따라 눈을 굴리다 아차 싶은 생각에 고개를 추켜세울 때면 반쯤 쓸려 들어가다 빠져나온 듯 머리가 더없이 무거웠다.
자연과 어우러져 자연이 깃든 순박하고 수더분한 장독대 옹기는 보는 마음에 여유를 준다. 그러나 항아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속에서 폭 곰삭든지 익어가든지 분주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듯 은밀한 울렁임이 충만하다. 사람 속도 항아리와 같아서 편안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한가지씩은 속에 담고 있는 크고 작은 고민이 있는 듯하다.
요즘 본의 아니게 내 안에 많은 비밀을 담아두게 되었다. 우연히도 만나는 이마다 비밀이라며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속내를 털어놓고는 마지막으로 뚜껑을 덮듯이 비밀이라고 말하는 통에 나는 얼떨결에 항아리가 되어 꾹꾹 눌러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하여도 그랬다. 햇빛 좋은 1층 카페에 앉은 나는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셨지만 다른 자리로 옮겨 앉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넓은 창을 등지고 앉아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창 밖 도로에서는 그녀의 머릿속의 엉킨 실타래처럼 교통수단들이 그녀의 꼭뒤를 중심으로 양 갈래로 더 없이 복잡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에 들락거리는 듯한 그 모습에서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녀와 누군가의 사이에 연결된 소통의 길이,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져 흐물떡거리는 그 그림의 길처럼 어지럽게 엉켜 그녀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듯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햇빛에 눈부신 일쯤은 참을만하였고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당부할 때까지 눈을 끔벅일 뿐이었다.
웅덩이를 만나는 일이 산책할 때만은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감정을 나누다 좋았던 감정은 오해와 실수로 웅덩이처럼 고여 앙금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런 일에 부딪히면 나는 웅덩이가 된 상처를 감추기 위해 슬슬 위장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갔었다. 무작정 덮어놓아 빛에 말라버릴 시간도 없이 곪아 터지도록 상처를 키우곤 하였다.
그녀 역시 웅덩이를 하나 품고 있는 듯 수심이 언뜻언뜻 보였다. 두고두고 웅덩이가 되었을 상처지만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 살갗에 앉은 딱지처럼 말라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성급히 떼어버리면 아직 깨끗이 아물지 못한 핏빛 새살이 아려올 것이다. 웅덩이가 차츰 말라서 비었다가 원래의 흙길로 돌아가듯 아물어갈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녀는 베보자기를 덮듯 살포시 내 손을 잡더니 밀봉하듯 비밀이라 말했다. 그렇다고 자리를 옮겨 앉은 말이 새어나갈까 염려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단지 옮겨 퍼 담아 둘 곳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바닥에 깔린 눅눅한 심기를 걷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무거운 이야기와 함께 덩달아 앓기도 했으나 곧 일부러 심드렁하니 마음을 비워 버릇하였다. 무거운 이야기는 바다 밑바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어 사는 한 마리 쑤기미처럼 항아리 밑에 가라앉아 항아리 주인인 나도 잊어먹고는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은 비슷비슷한 문제를 끌어안고 산다는 것을 절감하기에 내 고민도 한 마리 쑤기미처럼 가라앉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항아리 중에 뱃심 두둑한 전라도 항아리가 눈에 익다. 옛적에 우리 집에서 빗물을 받아마시던 항아리와 비슷하다. 언제 보아도 듬직하고 안정적으로 자릴 잡고 있으니 닮아봄직 하다는 생각이지만 남의 이야기까지 담아둔 내 항아리는 비온 뒤 논물 넘치듯 넘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찰랑찰랑 넘치려 간지럽게 목줄에 올라서는 이야기를 간신히 눌러 놓곤 한다. 몇 번은 주둥이에 금이 간 깨진 항아리 꼴이었다. 항아리는 깨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눈치 없는 누군가는 여전히 내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디를 가더라도 질그릇은 내 눈을 사로잡는다. 더욱이 웅덩이처럼 움푹한 항아리가 날 잡아끈다. 항아리에 홀딱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넘치기 전에 내 속의 이야기를 부어놓기 위함인지 모른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덜어내고 싶다. 내 이야기도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다. 큰 항아리라면 듬직하여 좋겠지 싶다. 그 안에 빗물을 반쯤 받아놓고 들여다보면 내 멍울도 풀어져 푸른 하늘빛이 내 배경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가 항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심사평-수필]문학 장르로서의 수필 그리고 항아리
새삼스러워 구태여 말하기도 뭣하지만, 수필은 자판 두들겨지는 대로 두들겨 그렇고 그런 내력이나 생각의 내용을 담아내는 문학 장르로 인식하고, 아무나 기웃거리고 껄떡대는 떡판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모두 수필가이다. 이는 이왕의 대가나 중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겠는데도 그들도 한통속으로 그 수많은 문학지와 수필지를 통해서 그 수많은 수필가를 생산하고 있다. 거기에 기왕의 시인 작가들까지 덩달아서 수필집 한 권쯤은 우리들의 코끝에 들이대니 수필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점에서 신문의 신춘문예를 거친 수필가는 제법 점잔을 빼도 될 성싶다.
이번 수필 부문에는 총 428편이 응모되어 그 중에서 10명의 30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결심에서 다시 4인의 작품이 최종에 올랐지만 결국 방민실씨의 ‘항아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윤남석씨의 ‘낫 놓고 기역 자를 되짚어보며’는 ‘낫’처럼 날카로운 지적인 문장이 뛰어났으나 그 ‘낫’에 마지막 작업을 부여하지 못하고 단지 ‘조선낫’의 찬양으로 끝맺음한 것이 흠이고, 이문자씨의 ‘대청소를 하며’는 비유가 거의 시에 육박한 듯하나 ‘방’의 소통뿐만 아니라 ‘먼지’의 행방까지 그 폭을 넓혔으면 싶고, 허효남씨의 ‘노고단 가는 길’은 문장이 거칠 것이 없이 참 매끄러우나 ‘세파’와 ‘화엄’의 갈등을 ‘노고단’의 높이와 ‘하늘’의 허허로움만큼 높이고 펼쳤으면 싶다.
방민실씨의 항아리에도 불만은 있다. 문장이 왠지 번역체처럼 꺼끌꺼끌한 느낌이다. 그러나 ‘웅덩이’에서 ‘항아리’로 다시 ‘가슴’으로 또 ‘컴퓨터’로 그리하여 끝내 수필로 이어지는 연상과, 고여 있는 물의 어둠과 무거움, 비밀과 폐쇄, 꾸정거림과 맑힘, 무의식과 의식, 넘침과 해방,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등의 갈등과 조화 등의 의미가 흔한 우물이나 거울,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이미지와 별스럽다.
수필은 단지 아무나 그 속에 내력과 생각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아니라 시와 소설의 원료를 간직하는 ‘항아리’인 듯하다. ‘항아리’의 이미지를 늘어놓으면 시가 되고 ‘항아리’의 침전물을 꺼내면 소설이 되리라. 그러나 수필은 단지 삶의 내용물이나 시와 소설의 재료를 보관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며 ‘그 안에 빗물을 반쯤 받아놓고 들여다보면 내 멍울도 풀어져 푸른 하늘빛이 내 배경으로 떠오르’는 존재물로서 문학 장르이다.
[당선소감-수필]
"버거운 알맹이 어떻게 채울지…"
빠릿빠릿한 구석이 없는 내게 작명가는 ‘민실(敏實)’이라 이름 지었으니 이제야 이름값을 하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민첩하게 열매를 매달았으니 말이다. 그것도 너무도 탐스러워 나에겐 더없이 큰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열매를 매달았으니 이 버거운 알맹이를 어떻게 야물게 채워나갈지 걱정부터 앞선다. 그리고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스친다.
숯을 만드는 과정 중에 가마 안에 나무를 차곡차곡 쌓을 때 흙에서 자랄 때와 달리 나무의 우듬지 쪽을 밑으로 하여 세운다고 한다. 나무가 땅에서 수액을 끌어올린 그 길을 거꾸로 물구나무를 세워야 수액을 제대로 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수액 같은 내 유년의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으며 수필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 수액이 다 빠지고 나면 숯이 되어 다른 사물에도 남다른 인식으로 활활 타오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의 불씨를 품고서. 그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신 유병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전북일보사에 마음깊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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