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7, 조선일보]
"우얍니꺼, 봄은 오겠지예" 할머니는 팬지꽃을 심었다
- 김윤덕 문화부장 -
카스텔라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고 내려선 플랫폼은 적막했다. 6일 오전 9시 동대구역. 마스크를 두 겹 쓴 뒤 양손에 의료용 라텍스 장갑을 꼈다. 배낭에 든 우비도 꺼내야 하나 망설일 때, 대합실을 청소하던 여인 둘이 허리를 길게 펴며 중얼댔다. "날씨 한번 죽인데이. 코로나만 아니마 봄 마실 가기 딱 안 좋겠나?"
햇살이 내리쬐는 역 광장은 뭉크의 그림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칠십은 족히 돼 보이는 인부 예닐곱이 코를 땅에 박고 호미로 작은 꽃모종을 심었다. 흰색, 분홍색, 파란색… 꽃말이 '나를 기억해주세요'라는 팬지꽃 수천 송이. "이렇게 나와서 일해도 괜찮으세요?"라고 묻자 마스크 위로 눈만 내놓은 할머니가 흙을 고르며 말했다. "집에만 있으려니 숨통이 멕혀서. 자슥들한텐 운동 간다 거짓말하고 나왔지. 꽃을 이래 심으니 싱싱한 흙냄새도 맡고. 우얍니꺼. 버티야지. 이라다 보면 봄이 안 오겠습니꺼?"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6일 6500명을 넘어서고, 그중 4694명의 확진자가 발생한 대구에도 봄은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확진자가 눈덩이처럼 불어 도시 전체가 불안과 공포로 마비됐던 지난주와 달리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 듯 하나둘 거리로 나섰다. 택시기사 정수영씨는 "우린 지금 3차 세계대전 중이라예.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아입니꺼"라며 씁쓸히 웃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나와야지예. 전시(戰時)엔 목숨 걸고 싸운다 안합니꺼. 정부요? 포기한 지 오랩니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임금님은 백성이 등 따숩고 배불러서 임금이 누군지도 잊고 살게 하는 사람이라카데예.“
/일러스트=이철원
동산동 대신천막사도 이번 주부터 다시 가게를 열었다. 마냥 쉴 수는 없어서 주인은 도시락을 싸서 나왔다. 강철을 자르는 전기톱에서 시뻘건 불꽃이 튀었다. "회사원들처럼 재택근무가 안 되니까(웃음). 몸으로 살라카니 우찌 됐든 나와야지예." 이번 주부터 재개장했지만 불 꺼진 가게가 대부분인 서문시장에서 점퍼 등 옷가지를 팔던 40대 여인은 "하루 두세 장 겨우 팔아도 집에서 뉴스 보기 싫어서 나온다"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확진자가 또 몇 명 나왔다 이러면 더 우울해져서…. 그래도 시장에 불빛이 있으면 (손님들이) 한번이라도 더 들여다보니깐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으로 앉아 있어예.
"계명대 대구 동산병원에선 매일같이 바이러스와 사투(死鬪)가 벌어지지만 의료진은 전국에서 보내주는 의료품과 도시락, 늘어나는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응원의 손편지들에서 따스한 봄기운을 느꼈다. 이 병원은 신천지 집단 감염 사태로 대구 지역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지난달 21일 자발적으로 국가 지정 코로나 환자 치료 전용병원으로 전환했다. 조치흠 원장은 "결단이 필요했지만 대구에 '노아의 방주'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해야 한다고 의료진과 마음을 모았다"고 했다.
병원을 분주히 뛰어다니던 한 간호사는 손편지를 가득 붙여 놓은 벽 앞에서 빙그레 웃었다. "요기 꼬물꼬물 쓴 것 좀 보세요. 열두 살 희영이, 둘째 희율이, 셋째 희은이 자매가 나란히 보낸 편지. 이것만 보면 정신이 번쩍 나요." 하트 모양 편지지엔 '코로나 걸린 분들 고처(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혔다.
봄을 더디 오게 만드는 건 정치인들이었다. 하루 관광객이 수백명 다녀가던 청라언덕 입구 텅 빈 우체국 마당엔 마스크 구입에 실패한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하루 280장뿐이라니. 찔끔찔끔 사람 욕만 보이고. 이기 나라가?" 약령시장 앞 타월가게 여주인은 아들과 도시락을 데워 먹다가 목이 멨다. "요 몇 주간 수건을 열 장도 못 팔았어예. IMF 때도 이러진 않았어예. 대통령, 총리가 왔다 가면 뭐합니꺼. 여기 오고갈 기름값으로 자영업자들 좀 살려주면 안 됩니꺼."
시립 화장장인 명복공원에도 봄 햇살은 깊은 슬픔으로 일렁였다. 오늘만 코로나로 사망한 시신 세 구가 들어왔다. 감염병으로 사망한 경우 선(先)화장 후(後)장례가 원칙이고, 그마저도 일반 화장과 분리해야 해서 오후 5시 이후 절차를 밟았다. 화장례 치르는 곳엔 방호복을 입은 유족만 들어갈 수 있다. 청도 대남병원에서 86세 노모를 여읜 아들은 어머니 영정을 든 채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4차 검사까지 음성이었는데 돌아가신 뒤 양성으로 나왔어요. 사형제 중 둘은 어머니 돌보다 자가 격리되는 바람에 못 오고, 임종 못 한 두 불효자가 이렇게 해괴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1차에서 양성으로만 나왔어도 어찌해 봤을 텐데. 어머니 가장 무서워하신 게 화장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썼다. "페스트균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유족의 숨죽인 흐느낌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자 흐느낌이었다. 화장터 너머 붉게 물든 저녁 하늘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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