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1, 조선일보]
지위도 체통도 白旗투항… 온국민 홀린 '검은 마력'
'그 마력은 뭐니 뭐니 해도 냄새가 퍼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 냄새에 슬쩍 감염되면 지위고 체통이고 다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가족도 국가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 냄새 앞에서는 백기를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다.'
가족·국가·이데올로기도 투항하고, 지위고 체통이고 모두 버리게 한다는 마력의 주인공은 짜장면이다. 시인 안도현이 에세이 '짜장면'에서 무조건 백기 투항을 선언한 '검은 마력'이 서해를 건너 이 땅에 귀화한 지 올해로 110년이 됐다. 52세가 된 아우 라면과 더불어 한국인의 영혼에 온기와 윤기를 불어넣어온 '국민 음식'이 첫발을 디딘 곳은 제물포였다.
110년째 영혼의 음식… 시작은 차이나타운
짜장면 맛의 승부는 3분 안에 난다. 강한 불에 양파와 춘장을 볶아 재료의 맛을 살린다. 이른바 ‘불맛’ 이다.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중식당 ‘홍연’ 의 강건우 주방장이 지난 28일 중식 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스를 볶고 있다. / 성형주 기자 지하철 1호선 인천역을 나서면 맞은편이 인천시 북성동 차이나타운이다. 1905년 화교 우희광(于希光)씨가 이곳에서 음식점과 호텔을 겸한 산둥회관(山東會館)을 개업하면서 한국 짜장면 역사의 서막이 열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천 중구청은 2005년 10월 '짜장면 탄생 100주년'기념 축제를 열었다.
우씨는 1883년 제물포가 개항하며 청나라 문물과 함께 건너온 짜장면을 메뉴 중 하나로 선보였다. 중국식대로 산둥성 된장인 면장(麵醬)을 국수에 비벼 먹었다. 쉽게 말해 된장 막국수였다.
우씨는 산둥회관을 1912년 '공화춘(共和春)'으로 개명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감격에 겨운 우씨가 '공화의 봄'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한때 인기 음식점이었던 공화춘은 1984년 문을 닫았다. 2006년 공화춘 건물은 근대문화유산 246호로 지정됐고, 2012년 4월 인천 중구청이 65억원을 들여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겨울비가 내리던 지난 25일 으슬으슬한 날씨에도 관람객이 2개 층을 메웠다. 아이를 안고 온 부모는 옛 공화춘 주방을 재현한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엄마 어릴 적에…"로 시작하는 추억을 들려줬다. 성인 입장료는 1000원. 인천중구시설관리공단에 따르면, 유료 관람객 정식 집계 첫해인 2013년에 14만5606명이 박물관을 찾았다. 2014년에는 18만3885명으로 늘었다. 이름 하나로 18만명을 불러모은 힘은 짜장면 이외에 다른 음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짜장면과 한국 짜장면은 엄연히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춘장(春醬)이다. 춘장은 중국에 없는 한국식 장이다. 1948년 화교 왕송산씨가 서울 용산구에 용화장유라는 식품 회사를 차리고 텁텁한 면장에 달큰한 캐러멜 시럽을 섞어 사자표 춘장으로 내놨다.
사자표 춘장으로 한국 짜장면은 천지개벽의 시대를 맞았다. 자르르 윤기가 도는 달콤한 맛은 한국인을 무장 해제시켰다. 사자표 춘장은 지금도 시장점유율이 80%다. 시골 음식점부터 서울 특급호텔까지 공히 사자표를 쓴다. 조리법이 제각각인 육수를 기본으로 하는 짬뽕과 달리, 짜장면 맛이 어느 정도 표준화된 것도 춘장의 힘이다.
면장이 왜 춘장으로 불리게 됐을까. 짜장면의 시초만큼이나 이설(異說)이 많다. 면장을 총장(蔥醬), 즉 총(대파)을 찍어 먹는 장이라 불렀는데, 총장이 변해 춘장이 됐다는 주장이 다수설이다. 사자표 춘장에 비빈 짜장면은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이 대거 음식점을 열면서 급속하게 퍼진다. 6·25전쟁을 거친 후 요즘처럼 양파·고기·전분 등을 넣고 볶는 한국식 짜장면으로 완성됐다.
현재 차이나타운에도 중국 음식점 공화춘이 있다. 그러나 예전 공화춘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한국인이 ㈜공화춘프랜차이즈로 상표등록을 해 2004년 개업한 곳이다.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고
짜장면 값은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 품목에 포함될 만큼 서민과 밀접하다. 1960년대 초 쌀 한 가마니(80㎏ 기준)가 3010원일 때 15원이었다. 요즘 짜장면은 4500원(통계청 자료, 2014년 12월 서울 기준)이니 50년 만에 300배로 올랐다. 짜장면 절반 값이던 설렁탕이 8000원 선으로 뛴 것에 비하면 정부의 물가 관리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지금은 커피 전문점 커피 한 잔보다 싸지만 한때 호사스러운 성찬(盛饌)이었다. 라면을 제외하면 짜장면만큼 시(詩)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도 드물다. 그룹 지오디는 짜장면으로 데뷔했다. 1999년 1집 타이틀곡 '어머님께'에서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며 귀한 짜장면을 아들에게만 먹이려던 모정을 노래했다.
시인들은 '내가 만난 모든 기념일은 짜장면을 통해 왔다/ 생일 입학 졸업 결혼기념일까지'(이영식 '짜장기념일')라거나, '가난이 힘인 줄 몰랐던 때/ 형제들과 짜장면 한 접시에/ 금 그어놓고 핥아먹다 싸우던 저녁 그때/ 우리들 머리통도 멀리서 보면 불빛이었을까'(최정례 '짜장면 짬뽕 우동')라며 짜장면의 추억을 불러냈다.
짜장면은 불과 기름이 만나 빚어내는 뜨거운 이중창으로 만인을 평등하게 만든다. 2008년 4월 비자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저녁 식사로 원한 것도 짜장면이었다. 2011년 성 김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부임 직후 짜장면을 처음으로 먹었다.
보편과 평등의 힘은 38선도 넘었다. 2000년 12월 김정일 당시 노동당 총비서는 양강도 현지 지도에 나가 간부들과 짜장면을 먹으며 "인민들에게 짜장면을 먹이기 위해 밀 농사를 열심히 하자"는 교시를 내렸다.
시조가 중국이다 보니 한·중 외교사절도 됐다. 2008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갔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연설에 나선 박 의원은 당시 고개 들던 혐한(嫌韓) 감정을 녹이려고 짜장면을 내세웠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한류 스타도 여러분의 음식인 짜장면을 먹고 컸습니다." 연설장에는 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름으로 국립국어원을 들썩이게 한 유일한 음식이 짜장면이다. 짜장면은 1986년 외래어표기법이 생기면서 갑자기 '자장면'이 됐다. 장(醬)을 볶은(炸) 면이라는 뜻의 중국어 '작장면(炸醬麵)'의 첫 발음이 '짜'가 아니라 '자'에 가깝다는 이유였다. 짜장면을 짜장면으로 부르지 못하게 되자 전 국민이 홍길동이 됐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짜장면되찾기국민운동본부'까지 결성됐다. 그 어느 음식도 누리지 못한 절대적인 애정이었다. 짜장면이란 단어는 쫓겨난 지 25년 만인 2011년 국어사전으로 금의환향했다.
유니짜장·유슬짜장… 뭐가 다른가
분식점을 평정한 라면과 달리 짜장면은 특급호텔의 고급 음식점에도 진출했다. 맛이 표준화된 짜장면이 호텔에 들어가면 무엇이 다를까. 특제짜장면이라는 이름으로 웨스틴조선호텔 '홍연' 메뉴판에 올라가 있는 짜장면은 물경 2만7000원. 강건우 '홍연' 주방장은 "주문을 받으면 그때부터 조리에 들어가는 점이 맛을 확연히 다르게 한다"고 말했다. 양파를 미리 까놓는 일반 음식점과 달리, 주문 직후 까서 썰고 고기도 바로 볶아 만든다. 맛의 핵심은 '센 불에 단시간'이다. 강 주방장은 "2~3분 안에 빠르게 볶아야 재료에 기름이 코팅되면서 육즙과 맛 성분을 그대로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보편화될수록 가짓수가 늘어난다. 짜장면은 7~8가지 정도다. 이름만 듣고 바로 알기 어려운 것이 유니(肉泥)짜장이다. '유'는 고기(肉)를 뜻하는 '러우'의 산둥 사투리다. '니'는 '닌찌', 갈아 만든 돼지고기라는 뜻. 즉 채소와 고기를 잘게 갈아 넣은 부드러운 짜장이다. 유슬(肉絲)짜장은 재료를 실처럼 가늘고 길쭉하게 썰어 면발과 같이 볶아 납작한 접시에 낸다. 재료에 소스가 잘 묻어 먹기 편하다.
간짜장의 '간(乾)'은 마르다는 뜻으로 국물 없이 볶는 음식명에 들어간다. 춘장에 물과 전분을 넣지 않고 볶아 낸다. 이와 달리 옛날짜장은 양파, 감자를 썰어서 춘장과 볶다가 물과 전분을 넣어 만든다.
쟁반짜장은 춘장과 면발을 함께 볶아서 커다란 쟁반에 담아낸다. 사천짜장은 사천식으로 고추기름을 넣어 볶아 매콤하다. 고추짜장은 고추기름에 청양고추까지 넣는다. 삼선(三鮮)짜장은 새우, 갑오징어, 건해삼 등 3가지 이상의 해산물을 넣는다.
요즘 짜장면은 국수의 제왕 자리를 스파게티에게, 배달의 선두는 피자에게 내줬다. 그러나 스파게티로 시를 짓고, 피자를 보며 눈물짓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호승의 시 '짜장면을 먹으며'는 살아갈 의지의 근원으로 짜장면을 들었다.'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검은 면발의 위안으로 이제껏 살아온 많은 이가 오늘도 중국 음식점에서 짜장면을 주문하고 있다.
짜장면 배달 '철가방'의 원조는'木가방'
철가방의 원조인 배달용 나무 가방. 인천 짜장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신정선 기자 짜장면이 '국민 음식'이 된 데에는 배달 문화의 상징인 '철가방'의 공(功)이 크다. 정확한 등장 시기나 만든 이는 미상(未詳)이나, 1930년대에 이미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당시 신문에는 우동을 배달하던 배달부가 자동차에 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때도 배달 음식으로는 중국 요리가 많았다. 한식보다 국물이 적었기 때문이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주문은 음식점에 가서 직접 했다. 1960년대 이후 전화기가 보급되고 1970년대 산업화 바람을 타고 포장도로가 깔리자 안방에서 '빨리빨리' 먹으려는 서민들이 앞다퉈 중국음식점으로 전화를 돌렸다.
철가방은 원래 목(木)가방이었다. 보온 효과는 뛰어났으나 무거웠다. 음식물이 넘치면 스며들어 냄새가 났다.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방이 잠시 등장했으나 제작비가 많이 들어 널리 퍼지지 못했다.
알루미늄이나 함석판으로 만든 오늘날의 철가방은 1970년대 탄생했다. 은색이라 깨끗해 보이고, 뚜껑이 쉽게 열리지 않아 배달하기에 수월했다. 음식물이 묻어도 바로 닦였다. 오다가다 찌그러져도 복구가 쉬웠다. 단순하면서 구조적인 디자인으로 모나미 153볼펜, 포니 자동차 등과 함께 2009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KDF)이 선정한 '한국을 움직인 디자인'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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