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23, 조선일보 기자수첩]
팽목港의 엄마들
- 김수혜, 정치부 기자 -
이곳엔 지금 경찰이 많다. 구조 선박만 드나들던 팽목항에 지금은 아이들 시신을 태운 경비선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온다. 경찰 수백 명이 정복에
형광 조끼를 입은 채 필요한 곳마다 폴리스라인을 치고 차량을 통제한다. 팽목항 북쪽 끝에 부모가 젖은 시신을 확인하는 천막이 있다. 그 앞에도
경찰이 한 팔 간격으로 늘어서서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거기 서 있는 사람 중엔 앳된 의경도 있고 경위
이상도 있다. 모자를 눌러써 감추려 했지만 울음을 참느라 눈이 벌게진 사람이 많다. 대체로 중년이다. 22일 새벽부터 오전 9시까지 12구, 한
시간 뒤 10시까지 다시 5구가 발견됐다. 그들이 속속 부두에 들어왔다. 각진 턱에 어깨가 딱 벌어진 중년 경찰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천막
안에서 비슷한 또래 아버지가 20분 넘게 굵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뭔가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불규칙하게 났다. 발을 구르는 건지 주먹으로
땅바닥을 내리치는 건지 소리만으론 짐작하기 힘들었다.
나도 엄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있다. 남들 보기에 내 딸은 사춘기 초입
뻣뻣하고 구부정한 숱한 아이 중 하나일지 모른다. 내 눈엔 딸이 매 순간 햇빛이다. 고만한 어린애가 수백 명 북적거려도 나는 1초 만에 뒤통수
보고 딸을 알아맞힐 수 있다. 내 아이 머리칼은 유난히 반짝거린다. 치킨이나 피자 같은 흔한 간식을 먹는 입이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이제
컸다고 딸은 툭하면 "엄마, 저리 좀 가" 이런다. 그래도 나는 틈만 나면 딸을 꼭 껴안고 양 볼을 문지른다. 그래서 세월호 침몰 현장에 내려온
첫날 여기 모인 엄마들 얼굴에 숨이 컥컥 막혔다.
세월호 실종자 아이들은 1997~98년생이다. 그땐 IMF 외환 위기로 온 나라가
힘들었다. 몇 년 뒤엔 집값이 크게 뛰었고, 그 뒤엔 다시 불황이 왔다. 그걸 다 겪으며 아이들 키워낸 부모들이 퉁퉁 부은 얼굴로 팽목항을
서성거린다. 한 엄마가 바닷바람 맞으며 시신 신원 확인 차례를 기다리다가 곁에 선 친정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엄마, 나 못 하겠어. 못 하겠어.
진짜 우리 딸이면 어떡해. 나 어떻게 살아." 곧 그 사람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