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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울었다가 이젠 그의 딸을 기다리는 사람들

죽장 2014. 3. 26. 15:59

[2014.3.26, 조선일보]

50년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울었다가

이젠 그의 딸을 기다리는 사람들

- 파독 광부 유한석씨 "지금도 한국 잘 되기를 아침저녁으로 기원" -

 

네덜란드 방문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오후 다음 행선지인 독일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독일 방문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비롯해 자신의 통일구상 발표, 독일 교민들과 만남 등 다양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독일 교민들 가운데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국빈 방문을 기다린 이들이 있다. 바로 1963년 1진으로 독일에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이다. 당시 250여명의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 1진은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직접 만났던 이들이다.
독일을 국빈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테겔공항에 도착해 사열을 받고 있다. /뉴시스
독일을 국빈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 테겔공항에 도착해 사열을 받고 있다. /뉴시스
파독 광부 1진으로 독일에 왔던 유한석(77)씨도 박 대통령의 방독을 기다린 이들 중 한 명이다. 1진으로 독일에 파견된 광부 123명 가운데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유씨를 포함해 6명뿐이다.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유씨는 “50년 만에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돼서 독일에 온다니 마치 헤어진 가족을 재회하는 기분처럼 반갑다”고 말했다.

유씨는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직접 만났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64년 12월 10일 박 전 대통령은 육 여사와 함께 뒤셀도르프 북부 함보른 탄광을 직접 찾았다. 당시 광부 1진들은 함보른 탄광과 아헨 지역 에슈바일러 탄광에 분산 배정돼 1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었다. 유씨는 “박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버스를 대절해 2시간 넘게 달려 행사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1964년 12월 10일 독일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독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방문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앞에 두고 박 대통령 내외는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왼쪽은 당시 함보른 광산 사장./유재천씨 제공
1964년 12월 10일 독일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독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방문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앞에 두고 박 대통령 내외는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왼쪽은 당시 함보른 광산 사장./유재천씨 제공
당시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에는 파독 광부·간호사 250여명이 모였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애국가가 시작됐다. 유씨는 “행사장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애국가 1절을 끝까지 부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애국가 시작과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울음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유씨는 “박 대통령과 육 여사까지 눈물을 흘리자, 행사장은 눈물바다가 됐다”며 “그땐 뭐가 그렇게 서러웠던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또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 가는 경제를 갖고, 독일에 차관을 얻으러 온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며 “박 대통령이 ‘내가 지금은 우리 청년들을 이 먼 땅에 보내 고생을 시키고 있지만, 후세는 절대 고생을 안 시키게 만들겠다’고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은 광산 기숙사에 들러 파독 광부들이 사는 모습과 그들이 쓰는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봤다고 한다. 유씨는 “박 대통령이 기숙사를 둘러볼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하면 대통령이 광산촌까지 들어와 광부들을 격려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박 대통령을 떠올리면 고마움과 함께 서글픔이 북받친다”고도 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독일 함보른 광산회사 강당에서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애국가를 부르다 눈물을 흘리는 간호사들의 모습. (책 '붕정칠만리' 中) /조선일보DB
1964년 12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독일 함보른 광산회사 강당에서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애국가를 부르다 눈물을 흘리는 간호사들의 모습. (책 '붕정칠만리' 中) /조선일보DB
유씨는 “박 대통령의 딸이 또 다른 대통령이 돼 독일에 온다니 지난 삶을 돌이켜보게 된다”고 했다. 그에게 독일은 ‘탈출구’였다. 농업진흥원에 다니던 유씨는 조선일보에 실린 광고를 보고 파독 광부를 지원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봉급은 쌀 한 가마니 값인 3200원.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그에겐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유씨는 “울산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마침 동생이 서울대에 입학하게 됐다”며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내 인생을 위해 스물 여섯 살이란 어리지 않은 나이에 독일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도착한 독일은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파독 광부를 바라보는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씨는 “독일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며 “한국이 어디 붙어있냐고 물어서 중국 옆에 있다니까, ‘중국 옆에 한국이 있나’고 재차 묻더라”고 했다. 그는 또 “한국에 기차나 자동차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며 “어린 애들한테까지 놀림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1964년 12월 독일 루르 탄광지대의 함보른 광산회사 강당에 도착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1964년 12월 독일 루르 탄광지대의 함보른 광산회사 강당에 도착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하지만 50년이 흐르며 독일인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모습과 독일에서 사는 한국인으로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1인당 GDP는 80달러였지만, 지금 한국의 GDP는 세계 15위 수준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유씨는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고, 이제는 한국에서 왔는지를 먼저 묻는 사람들도 많다”며 “처음 독일에 왔을 땐 독일 사람들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였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오는 28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박 대통령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파독 광부·간호사 등 교민들을 만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유씨는 “독일에서 오래 살아왔지만 아직도 한국 국민이 잘 살고 한국이 잘 되기를 아침저녁으로 기도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