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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美'자도 모르던 32세 청년, 세계 디자인 名門 들어가다

죽장 2013. 5. 21. 10:07

[2013.5.20, 조선일보]

미술의 '美'자도 모르던 32세 청년, 세계 디자인 名門 들어가다

"지홍, 우리는 당신의 머릿속이 궁금해요. 입학해서 한번 그 생각을 맘껏 풀어놓아 보세요."

염지홍(32)씨가 지난 3월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입시 면접을 보면서 들었던 말이다. 그는 오는 가을 학기부터 이 학교의 '서비스 디자인'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그는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아니다. 대학에서 이란어(한국외대)를 전공했고, 부모님이 운영하는 피자 가게를 도우면서 서울시 청년창업센터에 입주해 1인 기업을 운영한 것이 경력의 전부다. 그런 그가 어떻게 디자인 분야 세계 최고라는 RCA에 들어가게 됐을까.


	염지홍씨는‘옷걸이 독서대’(왼쪽 제품) 하나로 영국 명문 디자인학교 RCA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오른쪽 제품은 정독도서관에 납품한 조립식 독서대.
염지홍씨는‘옷걸이 독서대’(왼쪽 제품) 하나로 영국 명문 디자인학교 RCA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오른쪽 제품은 정독도서관에 납품한 조립식 독서대. /주완중 기자
그는 철제 옷걸이를 재활용해 독서대를 만드는 '옷걸이 발명가'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가 세탁소에서 버리는 옷걸이를 이용해 만든 즉석 독서대는 2010년 유튜브에서 넉 달 만에 4만 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유튜브로 '뜬' 건 싸이보다 먼저였던 셈이다. 캐나다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재밌다", "고맙다"는 메일이 날아왔다. "펜치 하나 들고 만든 건데 반응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죠. 나한테 뭔가 만드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게 더 큰 성과였죠." 대학을 졸업하고 특별한 직업 없이 지낸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기회를 살려 그는 1인 기업가로 나섰다. 서울시청년창업센터에 작은 책상도 한 칸 마련할 수 있었다. 어린이 교통사고 방지 야광카드 등 제품을 몇 가지 만들었고, 자신의 히트 상품인 독서대를 일회용 종이 제품으로 만들어 서울 정독도서관에 납품하기도 했다. 그는 "적성에 안 맞는 직장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운 것 같다"고 했다. 이런 모든 활동이 RCA에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포함됐다. 그는 "솔직히 바빠서, 취직 안 된다고 '88만원 세대'라며 나 자신을 연민할 겨를도 없었다"며 "내가 만약 취직해 남의 지시를 받는 일만 했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부모님의 작은 피자 가게 일을 도운 것도 큰 보탬이 됐다. IMF 외환 위기로 아버지가 명예퇴직하면서 시작한 사업이라 온 가족이 달려들어야 했다. 장남인 염씨는 종업원, 배달원, 주방장 등 1인 3역을 했다. 그는 "주변 중국집, 치킨집 등 '경쟁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전단을 직접 만들며 디자인을 익혔고, 가게 홍보를 위해 KBS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 1등을 한 적도 있다"며 "나에게 피자 가게는 세상을 가르쳐준 학교였다"고 말했다.

RCA 면접에선 '런던 응급의료체계 효율성 제고 방안을 말해보라'는 과제를 즉석에서 받았다. 그는 "잦은 앰뷸런스 호출에 따른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 '오토바이 앰뷸런스'를 도입하자"는 제안을 했다. 항상 피자를 배달해온 그로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그는 한국의 퀵서비스와 치킨집 배달원들이 오토바이를 타는 이유를 들려줬다. "내가 '직접 배달을 해봐 잘 안다'고 답했더니 면접관들이 재미있어 했어요."

만만치 않은 학비는 '펀딩'을 받을 계획이다. 작년에 그는 직접 펀딩을 해 남극을 다녀오기도 했다. 남극 답사를 보내주는 한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2위로 탈락한 게 아쉬워 직접 비용을 마련해버린 것. 그는 "남극이나 경유지인 아르헨티나와 관련 있는 회사를 찾아갔더니 일거리가 있었다"며 "시장조사, 샘플 전달 같은 일을 대행해주면서 스폰서를 모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그는 "분기별 보고서를 내고,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크리에이티브 컨설팅이나 아이디어 등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색 노트에는 그림과 글, 메모, 오려붙인 종이쪽지 등이 빼곡했다. 그는 "이 '제2의 두뇌(second brain)'가 내 아이디어의 보고"라고 말했다.

염씨는 RCA 도전 이유에 대해 "뒤늦게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도 전공자가 아니어서 결단을 못 했는데, 우연히 RCA 입시 요강 마지막 구절 '규칙을 깨라(break the rules)'를 보고 용기를 냈다"며 "나는 아직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그것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할 나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