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4.2, 조선일보]
대통령과 꽃
박근혜 대통령을 꽃에 비유하면 무슨 꽃일까.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을 백합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았다. 예를 들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상대편인 정두언 의원은 "이미지가 백합인 박 후보는 (본선 검증에서) '한 방'에 갈 수 있다"고 공격했다. 박 대통령도 백합 이미지가 싫지 않은 듯했다. 지난해 11월 모교인 서울 성심여고를 찾았을 때 첫마디가 "8회 백합반 박근혜입니다"였다.
그러나 백합은 정치인 이미지로는 너무 순백이다. 정치는 이념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이라 정치인은 때가 묻을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 "정치는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이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흙탕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럼 박 대통령에겐 무슨 꽃이 적당할까. 박 대통령은 2004년 7월 한나라당 대표 시절 기자들에게 삼성동 자택을 공개했다. 마당을 둘러보니 모과나무와 감나무, 비비추·패랭이꽃과 함께 옥잠화가 있었다. 옥잠화를 보면서 박 대통령 이미지로 백합보다는 옥잠화가 낫겠다 싶었다. 옥잠화도 흰색이지만, 공원이나 화단에서 비바람과 흙탕물을 맞으며 핀다는 점에서 백합과 다르다. 옥비녀(玉簪)처럼 길게 나온 꽃 모양이 가냘픈 박 대통령을 닮은 듯도 하다. 그러나 최근 정부조직법 협상 등에서 보인 단호하고 고집 센 태도를 보면서 가시가 있는 흰꽃인 찔레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상징은 인동초(忍冬草)다. 인동초는 이름 그대로 상록 이파리를 갖고 겨울을 견딘다고 붙인 이름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9월 16년 만에 광주를 방문해 5·18 묘역에서 "나는 혹독했던 십여 년 정치 겨울에 인동초를 잊지 않았다"며 "모든 것을 바쳐 한 포기 인동초가 될 것을 약속드린다"는 추모사를 했다. 김 전 대통령의 험난한 인생은 인동초와 잘 맞는다. 인동초 꽃은 5~6월 피기 시작해 7~8월에 지는데,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 인동초 꽃이 질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하는 '뉴DJ 플랜'을 내놓을 무렵부터 '인동초'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인동초라는 말에서 풍기는 투쟁적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5년 정계 복귀 시점부터 김 전 대통령을 취재하기 시작해 2009년 별세했을 때 고인의 일대기를 썼지만, 본인 입으로 인동초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대신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때 내놓은 책 '총재님 그것이 알고 싶어요'에서 "봄철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보는 것이 큰 낙"이라고 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노 전 대통령은 풀꽃을 좋아했고, 풀꽃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예를 들어 봉화산에 오를 때 억새와 참억새, 갈대의 차이점을 설명해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3월 "봄이 되면 봉화산 동쪽 화포천에 흐드러지게 피는 창포는 가슴을 들뜨게 만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산수유와 개나리는 노 전 대통령을 담기에 부족한 감이 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의 상징 꽃으로 꽃다지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꽃다지는 두해살이풀로, 겨우내 움츠리고 있다가 초봄 어김없이 노란 꽃을 피우는 들풀이다. 80년대부터 민중가요 제목과 노래패 이름으로 쓰여 저항 이미지가 강한 꽃이다. 노 전 대통령도 2003년 말 손녀가 태어나자 아들 부부에게 '다지'라는 이름을 추천하며 "다지라는 이름도 예쁘지만 금덩어리인 '노다지'를 이름으로 갖는 게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이런 점을 보면 노 전 대통령도 꽃다지를 좋아한 것 같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 정원에는 제법 자란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는 '대도무문(大道無門)'과 함께 '송백장청(松栢長靑)'이라는 휘호를 즐겨 남겼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오래도록 푸르다'는 뜻이다. 1995년 김 전 대통령이 대검 청사 준공식 때 심은 소나무는 'YS나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1927년생인 김 전 대통령이 아직도 건강하다는 점까지 감안할 때 김 전 대통령의 이미지로는 기가 센 소나무가 적당할 것 같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젊어서 쓰레기 청소원을 하는 등 바닥에서 출발해 자수성가한 정치인답게 "(원예종보다) 야생화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페이스북에 풍접초·구절초·코스모스 등 가을꽃 사진을 올리며 "(청와대를) 산책하다가 흐드러진 꽃들을 보고서야 가을이 성큼 들어섰음을 깨달았다"며 "저는 곱게 키우는 꽃보다는 야생화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참 좋다"는 글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 전 대통령의 꽃은 거친 야생화 중에서 골라야 할 것 같은데, 기회가 닿으면 본인은 어떤 꽃을 가슴에 두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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