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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벗들, 응석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죽장 2012. 9. 18. 12:02

[2012.9.18, 조선일보]

젊은 벗들, 응석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1992년 서울 한강 시민공원의 풍경이다. 이벤트회사를 그만둔 백수(白手)가 하릴없이 걷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자기보다 더 딱해 보이는 행상(行商)이 들어왔다. 그는 손님에게 오징어를 팔 생각이 없는 듯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이 물었다.

"왜 오징어를 쌓아만 놓습니까?" 오징어장수가 '한심하다'는 듯 백수에게 대꾸했다. "살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사. 난리 친다고 팔리는 게 아니야." 청년은 오기가 생겼다. 그럴 리 없다는 확신 같은 게 들었다. "제가 팔아보죠. 2만원어치만 외상 줘보세요."

첫 타깃은 버드나무 밑 남녀였다. 이영석은 생각했다. '남녀는 스킨십 기회를 엿볼 것이다. 남자에게 말 걸면 화낼 테니, 여자에게!' 예상대로 "오징어 안 사면 안 간다"는 너스레에 여자가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2만원어치를 한 시간 안에 다 팔았다.

다시 8만원어치를 가져왔다. 탄력이 붙자 그 많은 수량이 한 시간 만에 또 동났다. 원가(原價)가 절반이니 두 시간에 5만원을 번 셈이었다. 그날 이영석은 '수습 오징어 장수'가 됐다. '스승'으로부터 오징어 고르는 법을 배우며 1년 9개월간 그 생활을 했다.

독립(獨立)을 생각할 때가 됐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궁리했다. '오징어는 여름과 겨울에만 반짝한다, 그럼 사철 팔리는 것은?' 정답은 야채였다. 이번에도 스승이 필요했다. 서울 성동구 자양동에 살던 이영석이 선택한 이는 동네 트럭 행상이었다.

새벽마다 이영석은 그를 따라 가락동시장에 갔다. 배우는 처지이니 월급은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거대한 시장이 돌아가는 생리를 배우고 좋은 야채를 싸게 사는 법을 아는 것으로 족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났다. 1년 뒤 이영석은 자립의 길로 들어섰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가락동시장은 '동물의 왕국'같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모르면 손해 보고 알면 돈 버는 세상이었다. 당연히 주먹 센 놈이 판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시장 아줌마에게 물건을 잘못 사 환불을 요청하자 그녀는 욕설부터 퍼부었다. "어린놈이 재수 없게…"하며 소금까지 뿌렸다. 이영석은 가게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었다. 팬티만 남았을 때 그녀가 "오냐, 거시기 좀 보자"며 웃었다. 그랬던 그 오만한 표정이 진짜 그가 옷을 훌렁 벗어 던지자 홱 변했다.

가락시장에 괴물(怪物)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자 몇 명이 그에게 몰매를 줬다. 거기 굴복할 순 없었다. 맞은 다음 날부터 이영석은 한 명씩 뒤를 쫓았다. 화장실에서, 자기 집 문 앞에서 일대일로 만났을 때 가해자들은 사색(死色)이 돼 사과했다.

그는 그렇게 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 모진 고생 6년 만에 마침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18평짜리 자기 첫 가게를 열었다. 지금 '국가대표급 야채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총각네 야채가게'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 브랜드를 딴 점포가 지금 서울·경기도에만 40개다.

이영석의 삶에 고생문이 처음부터 예비돼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릴 적 그는 서울 강남에서 살았다. 부동산과 주류 유통업을 하는 아버지 덕이었다. 그랬던 풍요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끝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염(殮)을 마치자마자 우유 배달과 식당일을 시작했다. 형과 남동생은 인천시 부평으로 옮기고 그는 친구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은 그를 거칠게 만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질을 했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에게 청춘은 암흑(暗黑)이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영석에겐 독특한 철학이 있다. 인간은 다수의 똥개와 소수의 진도개(엘리트)로 나뉜다고 그는 믿는다. 똥개는 누가 자기보고 똥개라고 하면 화를 낸다. 진도개는 자기를 '똥개'라고 불러도 빙그레 웃기만 한다.

똥개들은 현실에 안주해 점프할 생각과 노력을 하지 않는다. '돈을 벌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면서도 '적성이 아니네' '자본금이 없네' '세상이 날 몰라보네' 하며 핑계만 댄다. 진도개는 누굴 만나도 자신을 낮춘다. 한 가지라도 더 배우겠다는 생각에서다.

이영석은 삼류 대학에 가서 강의할 때 이런 논리로 학생들의 성질을 팍팍 긁곤 한다. "왜 ○○대학에 다니세요?" 그가 이렇게 물었을 때 "공부를 못해 그 대학밖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답하는 학생을 그는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총각네 야채가게' 직원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너 가난해서 여기 일하러 왔지'라고 묻는 것이다. 그때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몇 년만 고생할 각오가 돼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영석은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지원자는 극소수라고 한다.

오히려 이런 식이다. "월급은 얼마입니까." "회사가 어떤 비전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저를 낳아준 부모도 제게 비전을 못 주었는데 제가 어떻게 당신에게 비전을 주겠습니까. 당신은 회사에 어떤 비전을 줄 수 있습니까?"

노력 하나로 신화를 쓴 이영석이 외쳤다. '지금 포기하면 앞으로 뭘 해도 포기할 것이다' '꿈꾸기 전에 대가를 치를 각오부터 해라' '2시간 먼저 출근하고 2시간 늦게 퇴근하고 남보다 2배 일해라!' 나는 이 이야기를 좌절한 청춘들에게 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