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양철지붕의 봄비 소리

죽장 2012. 4. 23. 13:33

[2012.4.23,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양철지붕의 봄비 소리

 

50대가 되어 보니까 봄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알았다. 30대에는 가을의 붉은 단풍잎을 보며 차분한 마음이 들어 좋았는데, 50대에는 봄의 연두색 새싹들이 왠지 모를 설렘을 준다. 이 세상에 설레는 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선천지기(先天之氣), 즉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배터리가 충만했을 때는 가을이 좋고, 배터리가 어느 정도 방전된 중년에는 봄이 좋은 것 같다. 사람이 연두색 새싹을 보면 마음이 환해지고, 의욕이 생기고, 생명에너지가 꿈틀거림을 느낀다. 한국 중년 남자들이 골프에 과도하게 열광하는 이유도 골프장에 가면 온통 녹색의 잔디밭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연녹색 잔디밭의 색깔이 자기도 모르게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연녹색은 또한 간(肝)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연녹색이 들어간 식품은 대체로 간에 좋다고 알려진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봄의 새싹들은 물을 먹어야 자란다. 봄비가 와야만 봄이 푸른 색깔로 단장을 한다. 따지고 보면 봄비야말로 봄을 봄답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필자가 머무르는 축령산의 삼칸 산방(山房) 지붕은 양철지붕인데, 지난주에는 봄비가 이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지냈다. 하늘의 소리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봄비 소리에 있었다. 하늘에서 세례(洗禮)를 내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대낮에 듣는 빗소리와 저녁에 듣는 빗소리의 느낌도 시시각각 다르다. 새벽에 듣는 빗소리는 대자연 속에 내가 고요하게 누워 있다는 느낌을 준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가 양철이라고 하는 인위(人爲)의 금속에 부딪치면서 내는 그 소리는 사람의 혼백(魂魄)을 정화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놀아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시간이 가 버린' 중년의 허탈감을 달래주는 우주의 거대한 기타 소리라고나 할까.

봄비와 양철지붕은 자연과 문명의 오묘한 궁합이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은 조물주가 봄을 색(色)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봄비 소리는 삶의 때를 벗기도록 해주는 하늘의 선물이자 천상의 음악이다. 옛 선비들은 초가삼간에 살았기 때문에 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묘한 빗소리를 모르고 살았을 테지만, 21세기에 사는 나는 이 양철지붕 삼칸 집에서 봄비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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