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19, 조선일보에서]
다 주는 대초원… '나를 내려놓는 법' 배웁니다
- 소설가 백가흠 -
몇 년 동안이나 미루었던 여행을 몽골로 왔습니다. 지난 시간 아무런 여유가 없었던 셈이지요. 서울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은 바쁘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던 시간은 아니었던 걸까요. 바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무너뜨린 여유에 대해 생각합니다.
울란바토르에서 500여㎞ 남쪽의 고원마을 어믄고비. 막 허물어지는 초원 위, 석양을 보며 되묻습니다. "넌 뭐가 그리, 언제나 바쁘니? 진짜 바쁘긴 하니?" 밤 열시인데요. 이제야 저녁이고 밤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시간을 번 느낌이 듭니다. 대자연 앞에서도 뭔가를 챙기는 데 익숙한 도시인의 습성이라는 것, 참으로 보잘것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하늘과 땅이 가진 빛과 색깔의 변화에 황홀해집니다.
초원에는 오직, 초원만이 존재합니다. 땅 위에 풀이 있고, 풀을 뜯는 양과 말이 있고, 그것을 돌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모든 생명들이 초원인 셈이지요. 초원 위, 인간은 초원을 정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울타리도 없죠. 양떼와 말들은 가끔 물을 마시러, 소금을 먹으러 잠깐 주인집에 들릅니다. 볼일을 마친 가축은 다시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찾아 자유롭게 떠납니다. 옆에 서 있던 몽골친구에게 묻습니다.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 "누가, 훔쳐요?" 초원에는 초원만 존재한다는 것을 매번 까먹습니다. 초원 위에 서서 저는 서울의 그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있었던 일이 새삼 떠오릅니다.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아이락이라는 술이 있는데요. 가축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입니다. 한 게르에 들렀을 때, 마침 가족은 양을 잡고 있었는데요. 안주인은 갑작스럽게 찾은 우리를 마다하지 않고, 손님방에서 저희에게 말 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대접했습니다. 큰 대접에 안주인은 아이락을 가득 담아 주었는데요, 우리는 그것을 돌려 마셨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살짝 몽골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돈은 어떻게 벌어서 사는 거야?" "이분들, 돈 안 벌어요. 돈 벌 필요 없어요. 겨울에 양고기 먹고, 여름엔 양젖으로 만든 요구르트, 마유주 먹어요. 가끔 양하고 감자나 곡식하고 바꾸어 먹어요. 이 사람들 돈 필요 없어요."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뻔히 그 친구를 쳐다보았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저 같은 사람들요."그가 고개를 떨구며 마유주를 마셨습니다. 그가 건네는 마유주의 맛이 시큼했습니다.
- ▲ 몽골의 초원에는 울타리가 없다. 초원의 주인은 초원일 뿐. 도시가 잊은 삶을 윽박지르지 않고 알려준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해가 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먹빛이 하늘에 돕니다. 저는 평생 바라보고 살았던 하늘, 남쪽을 바라봅니다. 신비한 하늘빛에 두고 온 하늘 아래, 제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초라해지는 저녁입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갖기 위해 저는 왜 그렇게 바빴던 것이었을까요. 그게 정말 자신을 위한 건 맞았던 걸까요. 멀리 떠난 후에야, 여행을 온 후에야 골똘해집니다. 돌아가게 되면, 한동안은 이런 생각으로 조금 여유가 생길까요. 다시 왜 바쁜지 모르게 바빠지겠지만, 그래도 전보다 마음은 무엇인가를 놓는 연습을 하게 되겠지요? 여름, 몽골여행에서 얻은 소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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