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4, 조선일보]
뽀로로는 재벌을 환영한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뽀로로'를 만든 최종일 아이코닉스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현대그룹의 광고 계열사 금강기획 출신이다. 최근 만난 그는 "그곳에서 애니메이션을 시작했고, 애니메이션을 배웠다"고 말했다. 현대·삼성·오리온 등 대기업이 잇따라 신사업 팀을 구성해 의욕적으로 영상사업에 뛰어들 때였다. 최 대표는 그때 회사가 시작한 애니메이션 사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사업단은 공중분해됐다. 문어발 논란, 모(母)기업의 경영난, 단기 수익을 중시하는 시장주의 관점이 대기업을 지배한 결과였다.
최 대표는 회사 내에서 업무를 바꾸는 대신 사직(辭職)을 택했다. 그리고 대기업에서 익힌 경험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대기업이 버린 사업을 홀로 끌고 가 지금 '뽀통령(어린이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대형 히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애니메이션이 중소기업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자본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땅따먹기를 하는 산업이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무한 확장이 가능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화를 위해 자본의 지원도 받고 싶고, 자본이 만든 캐릭터와 경쟁도 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한국 애니메이션만큼 해외 거대 자본에 개방된 산업도 드물다. 1970년대 한국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니메이션 '아톰' '플랜다스의 개'는 일본의 거대 미디어자본 후지가 만든 작품이다. '마징가 Z' 역시 일본의 거대 영화자본 도에이가 만들었다. '백설공주' '피노키오'를 만든 미국 디즈니는 지금 시가총액에서 벤츠를 가진 다임러와 비슷하다.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만큼 일찌감치 정부 보호막이 벗겨진 시장도 없고, 민족주의 소비 성향의 혜택에서 소외된 시장도 없다. 그래서 대자본의 강력한 힘이 필요했지만, 대기업은 아주 잠시를 제외하곤 이 시장에 눈길을 준 일이 없다. 미국과 일본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정부 보호막이 없는 곳에 돈을 투입해 본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애니메이션과 함께 대기업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분야가 한식(韓食)이다. 미국의 햄버거 문화가 아프리카까지 지배한 것은 맥도날드의 자본력 덕분이었다. 일본의 스시 문화가 서양인의 프리미엄 식단으로 인정받은 데에는 식품회사 기코만의 북미(北美) 확장 전략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한국 대기업은 한식 발전에 어떤 기여도 못했다. 거꾸로 양(洋)식당과 일(日)식당을 한국에 모셔온 것이 한국 대기업이다. 한식을 프리미엄급으로 발전시켜 세계의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유망시장)을 공략하는 대신, 국내 레드오션(피를 흘리며 경쟁을 하는 포화시장)에서 중소업자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대기업이 손을 대면 산업의 질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떡볶이에 손을 대면 떡볶이가, 김밥에 손을 대면 김밥이, 통닭에 손을 대면 통닭이 최고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자본을 투입해 중소상인이 몰락하는 시장이라면 제품 수준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정당화될 수 없다. 반대로 꼭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 아니더라도 대기업이 자본을 투입할수록 박수받는 중소형 산업이 얼마든지 있다. 이런 산업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 이런 산업에 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우리 대기업에 있다. 지금까지 세계가 인정해온 '한국식 오너 경영'의 최대 강점은 사실 그런 능력을 두고 해온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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