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0.6.21]
[조용헌 살롱] [739] '건달'論
건달(乾達)의 기원은 불교의 건달바(gandharva)라고 하는데, 건달바는 제석천(帝釋天)에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만 연주하는 신의 이름이다. 고려 때까지 불교가 국교였으므로 큰 사찰에는 각종 의례에 동원되는 악사(樂士) 집단이 있었다. 이들을 '건달바'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에 들어와 불교세력이 약화되면서 이들 악사 집단인 건달바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었고, 호구지책으로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다니면서 배운 재주로 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한국 건달의 원조가 되었다.
건달은 뚜렷한 직장이 없이 먹고 노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건달이 되어 보아야 인생을 안다. 돈이 없으니까 을(乙)의 심정을 안다. 을을 모르면 갑(甲)도 모른다. 먼저 을을 알고 그 다음에 갑을 알아야 정통코스를 밟는 셈이다. 출퇴근이 없으니까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바람도 먹어 보고,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자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경험한다. 풍찬노숙을 해봐야 세계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공자도 55세부터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건달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불후의 고전인 '논어'가 나온 것이다. 공자가 직장생활만 했으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었다고 본다. 경주에서 태어난 최수운(崔水雲)도 먹고살기 위해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약 10년에 걸쳐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행상을 한 것이다. 말이 장사이지 내가 보기에는 건달생활과 다름없다. 이때 최수운은 천하의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이 10년의 낭인생활 체험에서 결국 양반 상놈 없는 '동학(東學)'이 나왔지 않나 싶다.
건달을 이야기하면서 대원군을 빼놓을 수 없다. 천대받던 건달시절에 읊었던 시가 이렇다. '부귀가 하늘을 흔들었지만 예로부터 죽어왔고, 빈천이 뼛속까지 이르렀어도 지금까지 살아왔네, 천억년이 가도 산은 오히려 푸르고 보름밤이 오면 달은 다시 둥글다네'. 원주에 살았던 무위당(無爲堂) 장일순도 직장 없는 건달이었다. "어이! 나는 건달이네, 그러나 세상일을 해보려면 건달이 되어 보아야 하네.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밑을 엎드려 기어 보아야 일을 할 수 있어." 그러고 보니까 이 칼럼 쓰는 일 빼고는 나도 거의 건달에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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