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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남극 쇄빙선 아라온호

죽장 2010. 3. 17. 08:18

 돌아온 남극 쇄빙선 아라온호


- 세계 20척밖에 없는 선박, 우리 손으로 만들고 실험… -

- 6월 기후조사하러 대장정 -



"남극의 얼음을 깨고 돌진할 때는 정말이지, 비포장도로에서 오토바이 타는 기분이었습니다. 배는 덜컹덜컹 소리를 내고, 얼음은 쫙 갈라지거든요. 기막힌 장면입니다."

15일 인천항으로 귀국한 한국 첫 쇄빙연구선 아라온(Araon)호의 조타실에서 만난 김현율(金賢律·52) 선장은 "아직도 남극의 얼음 덩어리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듯하다"고 했다.


작년 12월 18일 김 선장은 극지연구소 연구원 15명과 선원 등 83명을 이끌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이후 뉴질랜드의 남섬 크라이스트처치를 거쳐 1월 23일부터 2월 10일까지 서남극의 케이프벅스, 동남극의 테라노바베이에서 얼음깨기 실험에 성공했다. 총 왕복거리가 3만3000㎞에 달한다. 남극·북극 결빙지역 탐사를 위해 작년 6월 한진중공업에서 진수된 아라온호는 60가지 탐지 및 모니터링 장비를 탑재한 첨단선이다.


"남극이나 북극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쇄빙선이 있어야 해요. 세계적으로도 러시아·이탈리아 등에 20척밖에 없는 것을 우리가 만들어 실험한 겁니다."


 

88일간의 남극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김현율 아라온호 선장



STX에 입사해 항해사를 거쳐 자동차운반선 및 광석운반선 선장을 맡으며 1년에 8개월은 바다에서 살았다는 그는 지난해 7월 인사팀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 경력을 가진 김 선장이 남극에 꼭 가달라"는 주문이었다.


"13년간 선장으로 일한 자동차운반선을 떠날 수 없다고 떼를 썼어요." 그는 "연구선 선장은 해본 적이 없어 솔직히 두려움이 앞섰다"고 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에 결국 졌고, 그는 '얼음깨기'에 관한 책 수십권을 읽고 러시아 전문가들도 만나 공부했다. 김 선장은 "그동안 한국이 외국 쇄빙선을 빌려 연구해온 것을 알고 나니 '우리가 해내자'는 결심이 섰다"고 했다.


아라온호 팀의 목표는 두께 1m짜리 평탄한 얼음을 3노트(1노트=시속 1.8㎞) 속도로 깨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극에 도착하니 모양은 산(山)과 같고, 길이는 수십㎞에 이르는 거대한 얼음들이 둥둥 떠다녔다. 김 선장은 "남극에서 평탄한 얼음지역을 찾기란 산속에서 축구경기장 찾는 격"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1월 27일, 헬기 정찰 끝에 반경 7㎞ 정도인 평탄빙을 찾아 돌진했다. 조금씩 얼음을 깨고 가던 배가 갑자기 멈췄다.


"복판에서 딱 멈춰서더라고요. 속도가 너무 낮았던 겁니다. '아름답다'고 생각되던 얼음이 '질린다'는 느낌을 줬어요. 어쩔 수 없이 후진했죠."


조사 결과 배가 물에 너무 깊게 잠겨 가속력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틀간 탱크에서 물을 빼는 등 무게를 줄여 깊이를 조정해 재실험에 나섰다. 덜컹거리는 배 사이로 얼음이 쫙쫙 갈라졌다.


그는 "해냈다는 기쁨과 함께 내 인생 최대로 어려운 숙제를 마친 느낌이었다"고 했다. '아라온호로는 불가능하다'던 러시아 쇄빙선원들도 '어떻게 해냈냐'며 비결을 물었다고 한다. 아라온호는 이후 충격쇄빙으로 두께 6.8m짜리 얼음지역을 뚫는 실험에도 성공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 선장은 길게는 36시간이나 뜬눈으로 조타실에서 지내기도 했다. 뱃고동을 울려대도 절대 피하지 않는 펭귄떼와 충돌할 일촉즉발 위기도 있었다.

 

[2010.3.17.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