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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代)잇는 '자영업 2세' 늘었다

죽장 2009. 7. 20. 15:08

대(代)잇는 '자영업 2세' 늘었다


- 독(獨)·일(日)처럼 중소업종 확산 "산업구조 안정화 따른 것"  -

- 선대(先代) 노하우 물려받아 최신 경영기법 접목까지 -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4가에 있는 수제 양복점 매장 '비앤테일러샵'. 53㎡(약 16평)의 공간에서 박정열(58)·창우(29)씨 부자(父子)가 양복 디자인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암홀(겨드랑이 부분)을 더 줄이면 맵시가 살 텐데요." (아들)

  "한국 사람은 넓은 걸 좋아해. 40년 넘게 옷을 만든 내 감각을 믿어." (아버지)

  정열씨는 1967년 전북 전주에서 양복 일을 배운 뒤, 1969년 상경(上京)해 1980년 양복점을 열었다. 그의 장남 창우씨는 고3이던 1998년부터 양복점에서 일해 왔다. 창우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옷 만드는 걸 봐서 그런지 양복 자체를 좋아하고, '내가 만든 옷을 사람들이 많이 입으면 좋겠다' 싶어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차남 창진(27)씨도 옷에 빠져 3년 전 이탈리아밀라노에 있는 마랑고니 학교로 '양복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마치면 아버지·형과 함께 일할 계획이다. 창우씨는 "아버지 혼자 일할 때는 40~60대 손님이 저희 가게를 많이 찾았지만, 제가 일하고 나서 20~30대 고객이 많아졌다"고 했다. 부자는 "앞으로 세 부자가 최고 품질의 양복을 만들며 가게를 늘려가는 게 목표"라 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한일목각'을 운영하는 홍성철(65)씨는 목각을 한 지 35년이 됐다. 17년 전부터는 향나무 유골함만 만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 유골함도 홍씨 작품이다. 홍씨의 아들 성기(30)씨는 4년째 아버지 밑에서 나무선별·재단·디자인노하우를 전수받으며 유골함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는 세명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소형 설계사무소에 다니다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 성기씨는 "화이트칼라 직종에 대한 선망이 있었지만, 아버지 권유도 있고 앞으로 장인으로 인정받으면 전망이 밝을 것 같아 이 길을 택했다"고 했다. 부자가 함께 일하면서 매출도 20%쯤 늘었다. 아들 성기씨가 전국 화장장 50곳을 돌며 유골함을 홍보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아버지 성철씨는 "일본이나 독일에서는 대를 이은 장인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식들 고생한다고 일부러 안 시키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고 했다. "지금도 기술·장인에 대한 인식이 낮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느껴져요. 3월에 태어난 손자도 이 길을 택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도 대(代) 이어 가업(家業)을 맡는 가족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무형문화재 등 특수 분야에만 국한됐던 가업이 일반 자영업으로 차차 확산되는 게 주요 특징이다. 자영업에 대한 사회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점, 불황으로 인해 20~30대 취업·구직이 힘들어졌다는 점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한정식집 '대림정'을 46년째 운영하고 있는 남상만(61) 한국음식업중앙회 회장은 "과거에는 마땅히 할 일이 없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어서 식당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음식 맛과 식당 경영에 대한 원칙과 철학을 가진 2세들이 눈에 띈다"고 했다.

 

  묵 전문점 '도토리마을'의 서보건(33)·보균(31) 형제는 어머니 장영일(53)씨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았다. 2007년부터 서울 광장동 본점을 운영하고 있는 형은 미국에서 치대를 졸업했다. 작년 8월 경기도 구리에 분점을 낸 동생은 건국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대기업 유통회사와 외국계 은행에서 연봉 6000여만원을 받고 일하다 묵 만드는 사람이 됐다. 동생 보균씨는 "어머니가 20년 동안 쌓아 올린 맛에 전문 경영기법을 도입하면 기업으로 키울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고 했다. 그가 운영하는 가게는 면적이 165㎡(50평) 남짓하다. 그러나 고객이 차를 타고 오면 차 문까지 열어주는 호텔급 서비스를 보여준다. 그는 "앞으로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음식 개발은 물론 소스를 만드는 공장까지 지을 계획"이라며 "분점을 열 때 경제위기가 닥쳐 힘들었지만 지금은 한달 순익이 1000만원을 넘는다"고 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48) 교수는 가업을 잇는 자영업 2세들이 느는 이유에 대해 "국내 산업구조가 1960년대 농업에서 제조업, 서비스업으로 급격히 바뀐 뒤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했다. 선대(先代)의 직업이 대부분 대물림되던 농업 사회처럼, 산업화를 거친 후 소규모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종에서 자리를 잡은 아버지 직업이 후대로 이어지려는 것이라 설명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49) 교수는 직업에 대한 의식이 실용적으로 변한 점과 일부 자영업의 경제적 안정성이 높아진 점을 이유로 꼽았다. 김 교수는 "자영업을 하면 천하고, 판검사·의사를 하면 귀하다는 고정관념이 옅어지고 있다"며 "설렁탕집 알부자, 양복점 알부자 등 화이트칼라 부럽지 않게 사는 자영업자 수가 증가한 덕"이라 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가업승계지원센터 임승종(42) 부장에 따르면, 자영업자 가업 승계 관련 상담은 일주일에 2~3건 정도지만 최근 수년간 해마다 20~30%씩 늘어나는 등 상담건수가 계속 늘고 있다. 임 부장은 "일본의 경우 장수기업이 통계 기준에 따라 5만~10만개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여관, 청주·과자 제조와 같은 생활 밀착형 자영업이 대다수"라며 "이들이 내수 활성화는 물론 경쟁력 있는 지역 문화 형성에도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도 장수 자영업자 육성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2009.7.20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