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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금집'의 세계적 경쟁력

죽장 2008. 2. 16. 16:00
 

[경영 노트] 일본 '도금집'의 세계적 경쟁력


          - 전자·자동차 등 웬만한 산업은 한국·대만에 따라 잡혔지만

          - 화학산업만큼은 독보적 위치 흉내낼 수 없는 기술 갖춰

          - 세계 최고의 기술 보유한 중소 도금업체는 일본의 자랑


스즈오키 다카부미(鈴置高史) 일본경제신문 편집위원 (홍콩 주재)


▲ 스즈오키 다카부미(鈴置高史)




  일본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산업이 무엇일까. 자동차일까, 전자일까. 일본인에게도 의외겠지만, 정답은 화학(化學)이다. 2001년 이후 일본의 모든 산업 중에서 부가가치를 가장 많이 창출한 것이 화학산업(플라스틱 및 고무 포함)이다. 출하액 기준으로도 2002년에 수송기계 즉 자동차에 이어 2위로 부상, 규모 면에서도 주력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에서 화학산업은 그리 주목 받지 않는 존재였다. 저명한 경영학자인 이타미 히로유키(伊丹敬之) 씨가 1991년 '왜 세계에서 뒤처지나- 일본의 화학산업'이란 책을 출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지각생' 화학이 10년 후 일본을 선도하는 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변신의 비밀은 일본의 화학산업이 IT제품을 위한 고기능 소재 개발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에 이용되는 세라믹 기판이나 실리콘 웨이퍼가 대표적이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각각 100%와 75%에 이른다. 액정(液晶)에 이용되는 부품의 경우도 많은 소재를 일본이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세계시장 점유율 100%인 편광막(偏光膜) 보호 필름이 대표적인 예이다. 휴대전화에 들어 가는 카메라 렌즈 소재도 거의 100%가 일본제다. 따라서 돈벌이, 즉 부가가치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전자산업은 한국과 대만에 추격 당했다. 그러나 화학은 전자산업에 늘 새로운 소재를 공급하면서 신기술을 계속 개발해 '강한 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은 한국과 대만의 전자산업조차도 일본 화학산업의 주요 고객이 됐다.


  전자산업은 세계 각국 기업들이 국경을 넘어 경쟁을 벌이는 각축장이다. 따라서 소재업체에 대한 '신기술 개발 압력' 또한 매우 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자산업은 그만큼 큰 시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화학업체가 우수한 소재를 개발하기만 하면 대량으로 구매해 줄 수 있다.

  조립산업이 화학산업의 급속한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셈인데, 이런 구도가 자동차산업에서도 본격화됐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절약을 목표로 자동차를 보다 가볍게 만드는 경쟁이 치열한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수지(樹脂) 개발이 필수적이다.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는 식물성 원료로 된 수지가 위력을 발휘한다. 전자산업도 자동차산업도 기술혁신의 무대가 화학으로 옮겨간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나 대만, 혹은 중국의 화학기업이 충분한 자본력을 갖고도 왜 일본 기업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까. 전자나 자동차의 경우엔 일제히 일본을 따라잡고도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후발 기업이 모방하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자동차라면 선발 기업의 우수한 제품을 사서 분해하면 어렵지 않게 설계도를 재현할 수 있다. 텔레비전이나 DVD도 회로 설계를 모방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화학의 경우는 다르다. 예를 들어 풀처럼 소박한 물건이라도 완제품을 보고 제조 방법을 유추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떤 성분으로 만들어졌나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다 해도, 어떤 성분과 어떤 성분을, 제조과정의 어떤 타이밍에, 어떤 온도로 섞을까 하는 정도까지는 여간 해서는 알기 어렵다.


  세계 최대라고 자처하는 홍콩의 이어폰(earphone) 업체 기술자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음질만 큼은 일본제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형태는 일본제를 흉내 냈지만, 여러 부품을 결합하는 풀, 즉 접착제는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은 온도가 변해도 음질이 변하지 않는 특수한 접착제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접착제의 제조 방법을 우리는 모른다."

  중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모방 생산 대국'이 지금 무서운 기세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일본이나 한국, 대만이 '흉내 내기 어려운 화학으로 도망치는' 것은 날이 갈수록 절실한 과제가 됐다.


  화학을 무기로 아시아의 후발기업의 추격을 뿌리치고 있는 것은 대기업뿐만이 아니다. 종업원 40명 규모인 오사카(大阪)의 어느 도금(鍍金)업체. 도금을 통해 금속 표면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자랑한다. IT제품, 의료기기 등 용도는 매우 폭넓다. 이 회사의 경영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 도금집의 단가가 5엔이라면, 우리는 200엔이다."


  20년 전 이 회사의 거래처인 대기업이 공장을 점점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보통의 도금집으로 만족하다간 아시아의 경쟁 기업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이렇게 판단한 3대 째의 경영자가 '세계에서 우리밖에 만들 수 없는 도금' 개발에 착수한지 10년 만에 궤도에 올랐다.  '세계 최고의 빛 반사율', '높은 발수(撥水)성', '항균 기능'….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도금이 일본 각지에서 속속 개발되고 있다. 개발자는 대부분 중소 도금업체들이다.

 

  일본어로는 도금집을 '멧키야(メッキ屋)'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표면처리업'이라고 바꿔 불러 왔다. 30년 전 취재원이었던 사장에게 도금집이라고 했더니 싫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당시에는 도금집이라고 하면 뭔가 낮춰 보는 어감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일본 경영자가 스스로 '멧키야(メッキ屋)'라고 부른다. 도금이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일본 하이테크의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출처 : 조선일보 2008.2.16 C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