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낙서가 웃고 있다

죽장 2013. 10. 29. 16:24

 

  나는 낙서를 즐겨 하고 있다.

  낙서 장소는 거실 가장자리의 기둥 옆이다. 그 곳에 하는 나의 낙서가 보기에 조금 흉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한다. 가족들도 내가 하는 이 낙서를 별로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취미로 살려나갈 생각이다.

 

  외손자 녀석이 무척 빨리 자라는 듯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얼마나 더 자랐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벽에 표시를 해두는 것이었다. 아이를 벽에 붙여 세운 다음, 발뒤꿈치를 벽에 붙이고, 허리를 곧게 펴게 하였다. 삼각자의 직각부분을 정수리와 벽면에 밀착시킨 다음 표시를 하였다. 표시뿐만 아니라 그 옆에 몇 년 몇 월 며칠이라는 날짜까지 적었다.

  아이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우리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내 손을 잡아 낙서장소로 이끈다. 아이도 많이 컸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위치에 붙여 세우기만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가족들은 아이의 키가 전번에 표시되었던 위치보다 단 얼마라도 위에 그어지면 박수까지 치며 좋아한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달 전 여름휴가 때 표시해 둔 곳보다 1cm는 더 자라 있었다. 맨 아래 표시된 3년 전의 위치보다는 무려 한 뼘이나 차이가 난다. 내년 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아이를 둘러싼 가족들의 웃음이 요란하다. 낙서장에서 만나는 흐뭇한 풍경이다.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이다.

  나의 성장을 반기던 부모님의 손을 슬며시 놓으면서 한 여인을 사랑하였다. 그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볼 때만 해도 낙서하고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아이가 낳은 자식의 키를 기둥에 표시하는 낙서를 위안으로 삼으며 살고 있다니-.

  낙서를 하는 동안에도 세월은 지나간다.

  아이의 키가 표시된 거실 기둥을 돌아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오래 전에 성장을 멈춘 나의 육체와 쇠락의 길을 질주하고 있는 내 정신의 현주소다. 애써 모른 척하며 눈을 돌리니 거실 기둥에 붙어선 아이가 웃고 있다. 가족들이 웃음이 등짝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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