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불타는 금요일, 새벽 4시58분에 귀가한 그대에게

죽장 2013. 10. 17. 10:16

[2013.10.14, 조선일보]

불타는 금요일, 새벽 4시58분에 귀가한 그대에게

- 김윤덕의 신줌마병법에서 -

 

"일부러 시계를 보려던 건 아니었어. 그놈의 가을모기가 설치지 않았다면 뽀로로 알람이 천지를 뒤흔들 때까지 죽은 듯이 잤을 거야. 밤새 온 방을 유영하며 내 순결한 피를 섭취하는 흡혈귀를 응징하고자 이불을 박찼던 것인데, 요것이 하필 탁상시계 모서리에 날름 올라앉았겠지. 분노의 스매싱을 날리려던 순간, 현관문이 딸칵 하고 열린 거야. 도둑인 줄 알았지. 건실한 내 남편이 설마 새벽 2시도, 3시도 아니고 4시, 그것도 5시를 2분 남겨둔 시각에 들어온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거든. 유령, 꼭 유령 같았어. 허리춤에서 흘러나온 와이셔츠, 허공을 향해 부릅뜬 두 눈, 행사장 풍선처럼 양팔을 휘적이며 들어오더니 누군가를 향해 분노의 멘트를 날리고는 소파에 엎어져 코를 골기 시작했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이 전어회 좀 먹어봐. 이야~ 달다. 살살 녹는다. 아~ 해보라니깐.

"술, 안 마실 수 없겠지. 마시다 보면 자정을 넘길 수도 있겠지. 사장님 주재 아니고, 중학 시절 교회서 짝사랑한 여학생이 나온 동창회였으니 시곗바늘이 2시를 향해 달려가는 줄도 몰랐을 거야. 그게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니까. 바가지 긁는 거 아니야. 오히려 만취해서도 집을 찾아왔으니 대견해 눈물이 날 지경이야. 어느 집 남편은 술 취해 공중전화 박스에서 신발까지 벗고 자고 있더라 하고, 어느 집 남자는 동이 터 눈을 떠보니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던데, 당신은 열쇠로 문까지 따고 들어왔으니 천재 아니냐고."

―아, 글쎄 미안하대두. 그나저나 꽃게 대풍이라더니 어시장에 사람들 좀 봐. 자기랑 소래포구 온 게 얼마 만이야. 대학 갓 졸업했을 땐가? 그땐 이영애보다 예뻤지.

"우리 논어 선생님 왈, 세상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대. 날 때부터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 배워서 사람을 아는 사람, 겪어봐야 알아보는 사람, 겪어도 모르는 사람. 날 마누라로 고른 것 빼고는 당신, 도통 사람 볼 줄 모르는 사람이야. 박 과장만 해도 그렇지. 툭 불거진 이마, 얼음장 같은 눈빛에 삐딱한 입매가 딱 이리 관상이니 가까이하지 말랬지. 겉 보고 사람 판단하는 거 아니라며 펄쩍 뛰더니 어떻게 됐어. 당신이 발에 불땀 나도록 뛰어 쌓아올린 영업실적 가로채 먼저 부장 되지 않았느냐고. 정의의 화신처럼 굴던 강 대리는 어떻고. 입이 닳도록 충성을 맹세하더니 박 과장 박 부장 되니 뒤도 안 돌아보고 신발을 거꾸로 신었겠다. 하회탈 하 상무 뒤에는 줄 서지 말랬지?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사람 절대 출세 못 한다고 그랬어, 안 그랬어? 술자리에 가야 고급 정보를 얻는다고? 세 살배기도 스마트폰 하는 시대에 술자리에서 정보를 찾는 건 신석기시대 돌칼 쓰던 사람들밖에 없을 거야."

―그래, 신석기! 소래 갯벌 나이가 자그마치 8000년이래. 미세입자의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육지화되어가는 '펄갯벌'이래. 어디 보자. 여기 날아오는 새들이 직박구리, 깝짝도요, 붉은머리오목눈이….

"문제는 깝짝도요가 아니라 여인네지. 남자들 처세하기 팍팍한 세상이란 뜻이야. 흘끔 눈길만 줘도 희롱죄로 잡혀가는 마당에 술까지 취하면 무슨 실수 못 하겠어. '술 취해 기억 안 나요' 하면 가중처벌되는 건 알지? 뱀장어가 눈은 작아도 저 먹을 건 다 본다고,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영특한데. 구운 게도 물지 모르니 다리를 떼고 먹어야 한다는 속담 몰라? 물론 실수가 아니라 연정을 느낀 거라면 얘기는 180도 달라지지."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연정? 내 별명이 바보온달인 거 몰라?

"바보가 사랑에 빠지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법. 거리에 낙엽은 뒹굴겠다, 이문세 노래도 흐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이 달려드는 계절이니, 이무기 다 된 마누라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지긴 할 거야. 그런데 어느 동물학자가 이런 명언을 남겼어. 수컷은 사랑의 노예로 태어나고, 그 노예근성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그의 품격과 흥망을 결정한다고. 천하의 고관대작들 공중도덕 안 지켜서 줄줄이 추풍낙엽 되는 거 봤지? 고로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

―우와~ 석양에 물결치는 억새 좀 봐라. 사진 한 장 찍어줄까?

"모옌은 결혼이란 99퍼센트의 노력을 기울여 1퍼센트의 행복을 얻는 밑지는 장사라고 했지.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라고 했어. 오해는 마. 내 팔자에 행복은 무슨. 억지로 꼭지를 비틀어 딴 열매는 달지 않은 법. 사랑이 식으면 식은 대로, 미움이 쌓이면 쌓이는 대로 사는 거지. 무서운 건 악이 아니라 시간이라잖아? 다만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삶의 명제가 있어."

―파도만 보지 말고 바람을 보아라?

"그건 관상쟁이 송강호 대사고."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빙고! 그러니 불어. 지난주 금요일 새벽 4시58분37초에 만취 상태로 귀가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