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9.23, 조선일보]
H는 올해 입사 25년 차인 회사의 대선배이다(그가 대리일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5년 전만 해도 H는 회사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상사였다.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자로서 업계 최고 수준의 업무지식으로 중무장하여 직원들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고, 후배들에게 가차 없는 질책을 퍼부었다. 직원들은 그를 어려워했고, 그에게 심한 질책을 들은 직원들은 그에 대한 뒷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신입사원급 직원들에게는 '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최고 수준의 업무능력을 가진 상사였지만, 인기 있는 상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업무적인 능력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후배 직원들과의 소통과 조직생활에 서툴렀던 그는 지난해 결국 관리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실무 직원으로 발령이 났다. 이미 나이 50을 훌쩍 넘긴 그에게 회사는 더 이상의 미래를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무 살이 어린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한 명의 실무자로서 조용히 정년을 기다리고 있다.
사기업 직장인의 운명에 '명예로운 은퇴'란 없다. 대부분은 자리에서 내려와 주변의 시선을 견디며 조용하고 쓸쓸하게 사라진다. 후배 직원들은 지금 모든 것에서 내려온 H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리고 이제 같은 실무자인 H에 대한 예우를 갖추며, 우리의 미래를 위로한다. 곧 자연인으로 돌아갈 H가 남은 직장 생활 동안 많은 것들과 화해하기 바란다. 당신은 인기 없는 남자였지만, 멋있는 장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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